항목 ID | GC0560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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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繼憲 |
이칭/별칭 | 백술(伯述),석문(石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수용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술(伯述), 호는 석문(石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최경장(崔慶長)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최홍유(崔弘有)이다. 어머니는 진원 박씨 박근효(朴根孝)의 딸이고 부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근(李勤)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계헌(崔繼憲)[1590~1643]은 화순 출신으로, 재주가 남달랐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규합하고 안방준(安邦俊)의 의병소로 들어갔다. 이에 안공이 저지하며 이르길, “그대는 형제가 없고 또한 관직에 있는 몸이 아니니 반드시 의병으로 나서야 할 까닭이 없다”라고 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전략을 돕고 병기를 수선하는 일을 맡았다.
이민신(李敏臣)·박춘장(朴春長) 등 여러 의사들과 함께 군량을 모집하여 군수를 도왔다. 그리고 여산까지 이르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와 세상사를 멀리하고 보성의 석문(石門)에 은거하였다.
최계헌이 현인들과 벗하며 살자 사람들이 고사(高士) 5인이라 하였으며, 죽은 후에 향인들이 사우를 세워 제향하였다. 『산양지(山陽誌)』에 최계헌의 성품에 대해 칭찬한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