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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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翰昌 |
이칭/별칭 | 최창혁(崔昌赫),대수(大叟),은암(隱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수용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창혁(昌赫), 자는 대수(大叟), 호는 은암(隱菴).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휘(曺撝)이고, 아버지는 최언연(崔彦嚥)이며, 어머니는 금성 나씨(錦城羅氏) 나응무(羅應斌)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한창(崔翰昌)[1722~1789]은 학문이 순실하여 심경과 근사록 및 성리학 저서들을 전심하여 강구하였고, 사물(四勿)[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예(禮)에 의해 경계해야 될 네 가지 조목]과 경재잠(敬齋箴)[주자의 경(敬)에 대한 가르침]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형제들과도 한 집에서 화목하게 지내니, 당시 사람들이 옛날의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의 별칭]이 형 백강(伯康)과 우애한 것으로 비유하였다. 이 고을의 수령인 박명순(朴明淳)이 ‘경학지사 효우지인(經學之士孝友之人)’이라는 8자로 연이어 천거하였다.
[묘소]
묘는 화순군 동면 청궁리 면학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