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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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之湖 |
이칭/별칭 | 모후산인(母后山人)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지용 |
출생 시기/일시 | 1905년 12월 24일 - 오지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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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82년 12월 25일 - 오지호 사망 |
출생지 | 오지호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
성격 | 인물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화가 |
[정의]
전라남도 화순 출신의 서양화가.
[가계]
본명은 점수(占壽), 호는 모후산인(母后山人). 아버지는 한말 보성 군수를 지낸 오재영(吳在永)이고 어머니는 김선군(金宣君)이다.
[개설]
서구의 인상주의 회화 양식을 추구하며 빛과 색이 이루어내는 자연을 맑고 밝은 색채로 그려냈다. 오지호는 서구의 인상주의를 한국적 풍광과 정감으로 토착화시킨 화순 출신의 대표적인 서양화가이다.
[활동 사항]
오지호(吳之湖)[1905~1982]는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를 거쳐 휘문 고보에 편입한 뒤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23년 고려 미술원을 다니면서 그림을 배웠으며 1925년 일본 가와바다[川端] 도화 학교를 거쳐 1926년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진학하였다. 1931년 동경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녹향회에 가담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총독부의 탄압으로 배일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녹향회 활동을 중지하고 고향인 화순 동복으로 내려와 고향의 풍경을 화폭에 담으며 칩거하였다.
1935년 당시 송도 고보에 재직하던 김주경의 권유로 송도 고보 도화 교사로 부임하며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7년 가을부터 1938년 봄까지 작업을 통해 김주경과 함께 한국 최초의 원색화집인 『오지호·김주경 이인화집』을 발간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두 사람의 작품 각 10점과 오지호의 「순수회화론」, 김주경의 「미와 예술」 두 논문이 함께 실렸다.
1945년 해방을 맞고 고향 동복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1948년부터 광주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강용운, 김보현 등과 함께 광주 미술 연구회를 조직하고 광주 화단에 본격적으로 서양화의 기법을 소개하며 향토 미술의 진흥에 힘썼다. 1949년 조선 대학교 미술과 교수직을 맡아 1960년까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1953년 광주 지산동에 집을 마련하고 생활하며 창작 활동에 몰입하였다.
1960년 4.19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오지호의 강한 신념은 조선대학교 생활을 마무리짓게 하였고, 이후 5.16 군사정변 때 4.19사건과 관련하여 1년간 투옥되었고 상고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1956년 국전 초대작가로 추대되어 1957년부터는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하였으며 1968년부터 1973년까지 국전 심사 위원 및 1976년 국전 운영 위원을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5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 단위 미술 대전을 창설하는데 참여하여 7회까지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1958년 한글 전용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한자 폐지 반대 운동에 헌신하였다.
오지호는 이처럼 서양화의 전파와 대한민국 미술계의 활성화, 그리고 한자 교육과 국어학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순수 회화론』[1938], 『피카소와 현대 회화』[1939], 『현대 회화의 근본문제』[1940], 『구상회화 선언』[1959], 『논집 :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1968],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1971], 『유럽 화단의 황혼』[1974], 『알파벳트 문명의 종언』[1979] 등이 있다.
작품으로는 「설경」[1926], 「초가집」[1926], 「사과밭」[1937], 「남향집」[1939], 「포구」[1948], 「초추」[1948], 「흑산도」[1949], 「무등산이 보이는 9월 풍경」[1949], 「장미」[1956], 「추경」[1957], 「수련」[1957], 「창가의 꽃」[1958], 「단풍」[1960], 「추광」[1960], 「목포항」[1965], 「목련」[1967], 「포구」[1967], 「만추」[1969], 「과수원 풍경」[1972], 「바다풍경」[1973], 「노르웨이 풍경」[1974], 「로테르담항」[1975], 「베니스 풍경」[1978], 「여름설악」[1981], 「춘경」[1981], 「유럽풍경」[1981], 「북구의 봄」[1981], 「화원」[1982], 「세네갈 소년」[1982], 「두 소녀」[1982] 등이 있다.
[묘소]
묘는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고, 1977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였으며, 2002년에는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