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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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革命 |
영어공식명칭 | Donghak Peasant Revolution |
이칭/별칭 |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갑오농민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혜영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62년 3월 27일 - 익산 동학농민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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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농민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오지영|김방서 |
[정의]
1894년 전라북도 익산 지역을 비롯한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개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동학교도들은 동학 금지령을 빙자한 지방관들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였다.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은 마침 익산 등 전라도 일대에서 일어난 민란과 결합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60여 년간 이어진 세도정치로 중앙정치는 문란해지고 탐관오리는 백성을 핍박하였으므로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최제우는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을 창시하여 1861년부터 포교함으로써 지친 백성들에게 호응을 얻었지만 ‘어두운 곳에서 무리를 모으고 난을 꿈꾸었다’는 죄목으로 1864년 처형당하였다. 전라도에서 동학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경전을 간행하는 등 교단 정비에 힘을 쏟았다. 강원도 인제에 간행소를 설치하고 『동경대전』·『용담유사』를 간행하는 한편 1880년대 초반 임오군란 등으로 정부가 동학에 손을 쓸 수 없는 틈을 타고 충청도로 확산시켜 갔다. 전라도에는 1880년대 초반·중반 익산 등지에 뿌리를 내려서 1880년대 후반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경과]
충청도·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각 고을의 수령·아전·토호들은 정부의 동학금지령을 빙자하여 교도들의 재산을 다투어 수탈하였다. 1890년대 이전까지 동학교도들은 체포되면 속전을 내고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하여 달아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늘어나고 조직화되자 교단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던 1893년 11월 15일 전라도 고부·전주·익산 등 각지에서 민란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는데 원인은 관리의 횡포·탐학·강압 등이었다. 고부에서는 1894년 1월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지나친 탄압에 항거하여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전봉준은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수세미(收稅米)를 농민에게 돌려주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사태 수습을 맡은 관리들이 수습책은 마련하지 않고 오히려 농민들을 더욱 심하게 탄압하여 자극함으로써 고부 봉기는 전국적인 농민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부 봉기를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가혹한 탄압을 하자 봉기는 전면적으로 확산되었다.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4월 7일 황토재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동학농민군의 뒤를 따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진을 친 초토사 홍계훈은 고종의 윤음과 자신의 효유문(曉諭文)을 성내의 동학농민군에게 전하고, 탐관오리는 법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하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하였다.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강화안을 제시하였다. 초토사 홍계훈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5월 7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거한 지 10여 일 만에 철수하였다. 동학 농민군들은 각자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기관으로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익산 지역에서는 김방서(金邦瑞)가 황등에 대도회소를 두고 이리·대장촌·춘포·함열 등에 접주들을 보내 회소를 맡아 사무를 보게 하였다.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으로 다급해진 정부가 청(淸)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일본도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동학교도들은 회의를 열고 항일 구국을 기치로 전국적인 봉기에 돌입하였다. 동학 농민군이 공주 우금치를 넘어갈 무렵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 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금치전투에서 절대적 무기의 열세로 농민군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패하여 논산으로 후퇴하였다가 전주, 태인을 거쳐 금구, 원평까지 후퇴하였다. 전봉준은 순창에 몸을 숨기고 후일을 기약하였으나 정부군에 붙잡힘으로써 계획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났다.
[결과]
우금치전투 이후 전라도 순천 및 황해도·강원도에서 일부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전봉준은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 피노리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일어섰던 농민들의 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은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최제우 사망 후 제2대 교주 최시형의 지도 하에 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학 지도부가 점차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충청도와 접한 익산 지역은 일찍부터 동학이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지방관의 횡포에 맞서 민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동학교도와 결합하여 혁명으로까지 연결시켰다. 비록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볼 때 대한제국의 개혁·독립운동 등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익산 지역은 3·1운동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오지영이 천도교 중앙총부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과 연계하면서 지역 교구의 교인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준비할 수 있었다.
[오지영과 『동학사』]
오지영(吳知泳)[1868~1950]은 고창군 무장면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1891년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2년 고향을 떠나 익산에 머물러 활동하면서 1893년 익산민란에서는 도상두(都狀頭)로 활약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익산 대접주인 김방서 휘하에서 참여하였는데 2차 봉기 시 남북접의 화해에 중재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은거하다가 1908년 익산교구장, 1909년 중앙총부 이문관서계원(理文觀書計員), 1911년 전제관장(典制觀長)에 임명되어 서울로 이주하였다. 1920년대에 천도교 연합회의 창설을 주도하여 천도교의 혁신파를 이끌면서부터 중앙 총부와 손을 끊고 지방의 교회를 중심으로 천도교의 폐단을 개혁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26년 익산의 천도교도들과 함께 만주 길림에 집단 이주하여 균등한 토지 분배와 공동 경작을 시도하여 보기도 하였다.
『동학사(東學史)』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계열의 활동상을 부각시키고 천도교 혁신 운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목적에서 1940년 오지영이 간행하였다. 내용은 1860년의 동학 창건으로부터 1905년 손병희에 의하여 천도교로 개칭되고 3·1운동을 겪으면서 1920년대 초 오지영 자신이 주도한 천도교 혁신 운동의 경과에 이르기까지의 약 60여 년간의 동학운동사를 다루고 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과 함께 동학 농민군의 격문(檄文)·창의문(倡義文)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동학농민혁명의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