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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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月州集 |
영어공식명칭 | WoljuJi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봉곤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 출신인 조선 후기 유학자 소두산의 문집.
[개설]
『월주집(月州集)』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소두산(蘇斗山)[1627~1693]이 남긴 글들을 모아 펴낸 문집이다. 소두산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 출신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당색(黨色)은 노론(老論)이며, 강직한 성격에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후손인 소수헌(蘇洙憲), 소휘면(蘇輝冕) 등이 소두산의 시문을 모아 5권 3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1866년(고종 3)에 쓴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66년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소두산은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소동명(蘇東鳴), 어머니는 전주이씨 효령대군 후손 응휴(應休)의 딸이다. 소두산은 1627년(인조 5)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서 출생하였다. 1652년(효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53년(효종 4)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다.
1660년(현종 1) 3월 성균관 시험에서 송준길이 소두산의 부(賦)를 수석으로 뽑았고, 이어 4월 전시에서 부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곧바로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을 거쳐 공조좌랑, 병좌좌랑을 거쳐 9월에 병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661년 전주부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집에 가까워서 여러 번 사의를 표명하여 체직되었다. 1662년 안주목판관에 이어 사헌부지평에 제수되고, 이후 충청도사, 서천군수를 지냈으며,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였다. 1666년 지평에 제수되어 송시열의 기년설을 반박한 유세철(柳世哲)을 비판하였다. 1667년 6월 장성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669년 나주목사로 전근되었다. 1670년과 1671년 두 해에 걸친 흉년에 배고픈 백성을 구하기에 힘썼고 보흠청(補欠廳)을 창설하여 백성들의 밀린 조세를 갚아주니, 고을이나 조정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1673년 1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렀고, 1675년(숙종 1) 5월 제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송시열의 당이라 하여 무고를 당하여 파직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다시 1680년 4월 강릉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683년 동래부사, 1684년 공홍도관찰사, 1685년 공홍도수군절도사, 1687년 의주부윤을 거쳐 1688년 4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1689년 1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무고로 파직되었다. 시사에 울분을 금치 못하였으며,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위패가 문묘에서 치워지자 아들을 시켜 잘잘못을 따져 억울함을 밝히게 하였고, 스승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자 삼례역에 가서 곡을 하고 돌아왔다. 이후 고향에 틀어박혀서 학문을 닦다가 1693년(숙종 19) 1월 병사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소두산이 세상을 떠난 뒤 사위인 권변(權忭)이 1722년(경종 원년) 묘지(墓誌)를 작성하면서 유고(遺稿)를 정리하였다. 이후 5대손 소수헌이 집안에 보관하여 왔던 유집(遺集)과 소두산 당대의 여러 문집들을 참고하여 정고본(定稿本)[저자가 남긴 초고본을 후대에 옮겨 쓴 판본]을 만들었다. 1866년에 이르러 7대손 소휘면이 문집의 내용을 증보·정리하면서 부록을 붙이고 조두순과 김병학(金炳學)의 서문과 발문을 받아 5권 3책으로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5권 3책의 목활자본이다. 표제(表題)와 판심(版心) 모두 ‘월주집’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한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단변(四周單邊)이다. 반곽의 크기는 22.2×14.7㎝, 10행 20자이다. 주는 쌍행이며, 어미는 상화문어미(上花紋魚尾)이다. 책 크기는 31.5×19.8㎝이다.
[구성/내용]
『월주집』은 총 5권 3책인데, 권1부터 권3까지는 저자의 시문을 수록하고 있고, 권4와 권5는 부록이다. 책머리는 송준길, 송시열과 진퇴를 함께한 소두산의 행적을 칭송한 조두순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고 문집의 총 목록이 이어진다.
권1은 시로, 모두 200여 수가 수록되어 있다. 오언, 칠언, 고시, 율시 등의 구별이 없이 1권 전체에 나열하였다.
권2는 소(疏)와 계사(啓辭)이다. 소는 1662년 4월 3일 정언을 사직한 소부터 1686년 형조참의를 사직한 소까지 14편이고, 아버지의 사촌형제가 황해감사를 사직할 때 대신하여 지은 글까지 15편이다. 그중 중간 부분의 「인구언응지진시폐겸걸귀양소(因求言應旨陳時弊兼乞歸養疏)」는 제목 그대로 1667년(현종 8) 왕의 구언응지(求言應旨)[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의견을 묻는 것을 구언이라 하고 이에 응하여 올리는 상소를 응지상소라 한다]에 대하여 지방관 역할을 강조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는 상소이다. 소의 대부분이 당시 사회의 부조리, 관리 및 권력자들의 민폐와 비리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직언하고 있다. 계사는 49편으로, 궁가(宮家)가 백성의 사유지를 침탈하는 폐단을 지적한 것과 윤선도를 비호한 홍우원(洪宇遠)의 삭탈관직을 청하는 것이 많다.
권3은 계(啓)와 장계(狀啓), 서(書), 잡저(雜著)이다. 계는 부산첨사 이저(李竚)를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청하는 계사로부터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의 출사를 청한 계까지 17편으로서, 관리들의 출척(黜陟)을 청한 계사이다. 장계는 조군(漕軍)의 과거를 허락하자고 청하는 장계부터 우후(虞候) 유성추(柳星樞)로 하여금 안주목사 이광한(李光漢)을 압송케 하자는 장계까지 10편이다. 주로 지방관으로 재임했던 시기에 재해와 조세 부과 등 사건 처리를 위한 장계이다. 사회·경제 및 제도상의 모순을 시정하려는 소두산의 견해를 알 수 있다. 서는 1687년 송시열에게 올린 편지부터 1689년 아들 소상열(蘇相說)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37편이다. 송시열, 김수흥(金壽興), 김만기(金萬基), 이이명(李頤命) 등 노론 출신 관리들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많다. 잡저는 서(序), 제문(祭文), 상량문(上樑文), 과작(科作)이다.
권4와 권5는 부록(附錄)이다. 권4는 1695년 숙종이 보낸 치제문(致祭文)과 사위 권변, 황익한(黃翼漢), 이민좌(李敏佐)가 보낸 제문, 김만증(金萬增), 권열(權說), 조상우(趙相愚) 등이 지은 만사 22편, 1722년 권변이 지은 묘지(墓誌), 1800년 송환기(宋煥箕)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1835년 홍석주(洪奭周)가 지은 행장(行狀) 등이 실려 있다.
권5는 연보(年譜)와 유사(遺事) 등 두 편이다. 연보는 5대손 소수헌이 기록한 것으로 61장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이다. 소두산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기록과 함께 소두산과 관련된 여러 사항이 연대별로 정리되어 있다. 유사(遺事)는 소두산의 언행과 덕행에 관한 기록으로, 총 스물네 개 항목에 이르는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권말에는 1866년 좌의정 김병학이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소두산의 출처와 의리, 공적에 대하여 칭송하였다.
[의의와 평가]
『월주집』은 조선 후기 당쟁의 한가운데에서 정치 상황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어야 했던 노론파 문인의 정치적 입장과 사상 및 문학적 재능 등을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