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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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馬誌 |
영어공식명칭 | Guemmaj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이화 |
[정의]
1756년 익산군수 남태보가 저술한 지리지.
[개설]
『금마지(金馬誌)』는 1756년 익산군수 남태보(南泰普)[1694~1773]가 지은 지리지로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해당하는 당시의 전라도 익산군 지역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상하 2권, 총 7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반 행정에서부터 사회문화, 역사지리, 정치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남태보는 본관은 의령이고, 자(字)는 숙도(叔燾), 호는 서산(西山)이다. 지방 군위현감 때 군위 읍지인 『적라지(赤羅誌)』를 편찬하였다.1754년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화재로 소실된 익산군 관아를 중건하고, 부임 2년째인 1756년에 『금마지』를 저술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저자 남태보는 『금마지』 하권의 끝에 「금마지 발문」이라 하여 『금마지』를 편찬하게 된 경위를 적고 있다. “옛 사람들은 읍지를 편찬할 때 비록 실개천이나 개미둑과 같은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찾아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제 소경정과 김진 등 고을 선비들이 지은 『익산지』를 들여다보면, 단지 『여지승람』과 『고사촬요』의 예에 의거하여 간단히 생략하면서 모두 기록하지 않은 것이 많다. 이에 옛 읍지에 새로 들은 것을 보태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가능한 한 자세하게 옛 고적을 싣고자 하였던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형태/서지]
가로 17㎝×세로 25㎝의 필사본이다.
[구성/내용]
『금마지』는 상권 71개 항목, 하권 6개 항목 등 총 7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의 경우, 「읍호」 등의 12개 항목에서는 익산군의 일반 행정 분야를 다루었고, 「기후」 등의 10개 항목에서는 자연환경 분야를, 「호구(戶口)」 등의 22개 항목에서는 재정과 경제 분야를, 「파수진영(把守鎭營)」 등의 6개 항목에서는 군사 분야를, 「성씨」 등의 21개 항목에서는 사회와 문화 분야를 기술하였다. 하권의 「마한흥폐(馬韓興廢)」 등 6개 항목에서는 『금마지』의 저자 남태보가 인식하고 있었던 익산군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익산 지역에는 익산 미륵사지와 익산 왕궁리 유적 등 1,400여 년 전에 세워진 백제의 문화유산이 다수 분포하는데, 『금마지』는 상권의 「사찰」과 「고적」, 「능묘」 등의 항목에서 천여 년이 지난 문화유산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어떠한 지리지보다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금마지』의 하권 「향리기언(鄕里記言)」 항목에서는 “양곡 소세양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거주한 20년 동안 온 고을에 기강을 엄격하게 세우고 풍속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사대부 가운데에서도 우리 지역을 살 만한 곳이라 여겨 너도나도 모여들어 호적에 실린 4,000호 중 양반 가구가 1,500호나 된다.”라고 기술하는 등 18세기 중반 무렵 익산군의 사회 정황을 자세하게 전하여 주고 있다.
「잡저(雜著)」 항목에서는 유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훈지당기(塤篪堂記)」를 전하고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하여 17세기 중후반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송시열과 송시묵(宋時默), 송시도(宋時燾) 등 삼형제의 우애도 엿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익산은 1,400여 년 전 백제 무왕이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 등을 조성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지역인데도, 익산의 옛 역사를 알 수 있는 문헌자료는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금마지』는 1756년 익산군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군수가 저술하였다는 점과 77개의 항목으로 분야별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18세기 중반 익산군의 정치와 사회, 역사와 문화 등을 전하여 주는 대표적인 문헌자료로서 의의와 가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