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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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彌勒三佛-善花公主- |
영어공식명칭 | Maitreya Trinity and Princess Seonhwa's Dream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
시대 | 고대/삼국시대/백제,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세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639년 - 익산 미륵사지 석탑 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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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2년 12월 20일 -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11호 지정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1년 -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 익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익산시사』에 수록 |
관련 지명 | 익산 미륵사지 석탑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
관련 지명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선화공주|무왕 |
모티프 유형 | 미륵 사상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전하여 내려오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
[개설]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은 전라북도 익산시에 두루 전승되고 있는 미륵사(彌勒寺) 석탑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미륵사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일대에 건립된 백제의 최대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절은 폐사되고 절터와 일부 유물만 남아 있다.
익산의 미륵사 창건담은 다양한 유형의 이야기로 전하여지고 있다. 다채로운 이야기 유형 중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2권 「기이(紀異)」 무왕조에 나오는 서사이다. 여기서 무왕(武王)[?~641]은 백제의 30대 왕이다. 무왕조는 크게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혼인담, 미륵사 창건담 등 두 종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은 이 중에서 미륵사 창건담의 일부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석탑 건립 이야기로 변형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무왕이 ‘서동’이라는 이름으로 자랐고, 신라 진평왕(眞平王)[?~632]의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미륵사나 혹은 석탑 관련 창건담에 선화공주가 표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채록/수집 상황]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은 2001년에 익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익산시사』에 수록되어 있다. 『익산시사』에는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과 대동소이한 모티프를 활용한 「미륵탑과 용 세 마리」 이야기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내용]
백제의 무강왕(武康王)[무왕]의 왕비 선화공주가 꿈을 꾸었는데, 큰 못 가운데서 미륵삼불(彌勒三佛)이 나와 세상에 나와야겠다고 말하였다. 왕비는 꿈을 깨고 나서 왕에게 꿈꾼 이야기를 하고 미륵삼불을 위하는 일을 하자고 말하였다. 왕은 왕비의 꿈 이야기를 듣고 탑 3개를 세울 것을 의논하고, 지금의 금마면 용순리 노상마을에 2개의 탑을, 왕궁면 왕궁리[탑리]에 1개의 탑을 세웠다. 왕궁리 궁평마을은 그때 왕궁이 있었던 자리라고 전하여진다.
『익산시사』에 함께 수록된 「미륵탑과 용 세 마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백제 30대 왕인 무왕은 왕이 된 뒤에도 자기가 어렸을 때 살던 고향의 사자암(獅子庵)이란 절에 선화공주와 같이 늘 다녔다. 사자암에 가려면 노상리 앞의 큰 못을 지나야 하는데, 하루는 무왕 내외가 그리로 지나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앞을 가리는 바람에 더 갈 수가 없었다. 그때 큰 못에서 용 세 마리가 나와 무왕의 앞길을 비추어 주었다. 그래서 무사히 사자암에 도착하여 사자암의 주지인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말하였다. 지명법사는 왕의 말을 듣고 나서 큰 못을 메운 뒤 그 자리에 큰 절을 짓고 큰 탑 두 개를 세우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무왕은 지명법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지명법사는 미륵산을 허물어 하룻밤 사이에 큰 못을 메웠다. 왕이 절과 탑을 지을 때 신라의 진평왕은 많은 공인을 보내어 절과 탑을 세우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았는데, 그 탑도 동쪽 탑은 없어지고 서쪽 탑만 남아 있다. 이 서쪽 탑도 완전히 남지 않고 일부만 남아 있다.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과 「미륵탑과 용 세 마리」는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일부 차이가 있다. 먼저 건립의 규모가 다르다.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에서는 사찰 건립에 대한 언급은 없고 총 3기의 탑을 세우되, 노상리에 2기, 왕궁리에 1기를 세운다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미륵탑과 용 세 마리」에서는 미륵사와 석탑 창건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다음으로 석탑 건립을 제안한 주체가 다르다.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에서는 선화공주가 적극적으로 석탑 건립을 제안한 데 비하여, 「미륵탑과 용 세 마리」에서는 사자암의 지명법사가 제안하고 있다. 미륵사와 석탑 건립 과정에서 선화공주의 역할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두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미륵탑과 용 세 마리」에서 ‘용’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왕과 용의 만남, 무왕을 도와준 용과의 인연이 미륵사 창건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른 미륵사 창건담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독특한 점이다.
두 이야기 중에서 「미륵탑과 용 세 마리」가 시기적으로 보다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륵사와 경내의 석탑은 조선 시대까지는 존치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 훼손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1980년대 이후 미륵사지 권역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사찰의 전체적인 규모에 대한 추정이 비로소 가능하여졌다. 따라서 「미륵탑과 용 세 마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동탑과 서탑의 존치 여부를 언급한 것은 이야기가 근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모티프 분석]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과 「미륵탑과 용 세 마리」 두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표제에서도 드러나듯이 ‘미륵 사상’이다.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에서는 ‘미륵삼불’이 선화공주의 꿈에 나타난 것이 석탑의 건립으로 이어졌고, 「미륵탑과 용 세 마리」에서는 지명법사가 미륵산을 허물어서 연못을 메우고 절과 탑을 창건하였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56억 7000만 년이 지나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출현하는 부처이다. 현실 세계에서 자기 수행을 성실히 하고 공덕을 쌓으면 미륵불의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과 「미륵탑과 용 세 마리」는 아름다운 미륵불의 세계에 환생하고 싶은 민중의 깊은 염원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