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008 |
---|---|
한자 | -洞窟遺蹟-韓國舊石器時代-自然- |
영어의미역 | Jeommal Cave Ruins Speak of Nature in the Korean Ston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장호수 |
[그들은 왜 동굴을 찾아 나섰을까]
1973년 6월 10일, 손보기 교수가 이끄는 연세대학교 박물관 동굴탐사단은 마침내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동굴을 방문하게 된다. 단양, 제천 일대 선사 유적을 찾아다니던 중 제천에서 고대사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석득의 길안내를 받아 한 동굴을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손보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단양에서 몇 개의 동굴을 조사하고 나서 이 굴에 이르렀을 때 굴의 입구로부터 8m 안쪽에 큰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그 둥그런 구덩이 가에는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구덩이 가 흙에는 뼈 부스러기와 빤질빤질하게 닳은 뼈 연모 등이 많이 흩어져 있었고, 벽의 자른 면에는 제 층위의 동물 화석이 박혀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상당한 힘을 들여 파 보았다는 것을 알게 하였고, 마을 젊은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귀중한 유물이 있다고 판단한 몇 분이 1967년에 금속 탐지기를 쓰면서 구덩을 판 것을 알게 하였다. 큰 뼈, 큰 뿔 등을 파서 이들은 그 중의 일부를 골라서 가마니에 넣어 서울의 한약국에 팔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찾은 것이 점말동굴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연세대학교 박물관 동굴탐사단은 다시 점말동굴을 찾아가 흩어진 뼈들을 추리고 흙을 체질하여 각종 뼈 유물 4838점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발굴 허가를 얻어, 1973년 11월 3일 마침내 역사적인 점말동굴 발굴을 시작하였다. 1964년부터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발굴한 지 10년이 되었고, 동굴을 찾아 나선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그들은 왜 그토록 동굴을 찾아 다녔을까. 구석기 시대 문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옛 조상들이 살았던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구석기 시대를 연구하려면 어떤 식물이 살았고, 어떤 동물과 더불어 살았는지가 그들의 생활뿐 아니라 기후 환경을 알아내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연구 과제이다. 그런 자료들을 동굴 유적에서 찾을 수 있었기에 연세대학교 박물관 동굴탐사단은 석장리 유적을 발굴하면서 끊임없이 동굴 유적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석장리에서 가까운 마암리 동굴을 찾기도 했으나 그곳에서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 동굴이 가장 많다는 남한강 상류 지역의 제천, 단양 일대를 답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단양 지역에서 금굴을 찾아갔으나 그때만 해도 금굴에서 동식물 자료를 얻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고, 가까스로 제천에 이르러 점말동굴을 찾아냈던 것이다.
[천연의 요새 점말 동굴]
점말동굴은 앞에서 보면 마치 바위 병풍처럼 보이는 30m 높이의 절벽에서 동쪽 끝에 뚫려 있는 굴이다. 병풍 위 산마루는 용두산으로 이어지며, 바위 병풍 앞으로는 작은 마당이 펼쳐 있고, 그 앞으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는 사시사철 마를 날이 없어 옛사람들이 삶터로 쓰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다. 동굴 앞에서 굴을 쳐다보면 바른 쪽으로 용의 눈같이 보인다고 하여 용굴이라고도 부르며, 가장 높은 산마루는 용머리산이라 부른다. 용굴은 2~3m 너비에 동서 방향으로 12~13m 정도 길이로 뻗어 있고, 입구는 동쪽을 바라본다.
한편, 동굴에서 앞쪽을 바라보면 멀리 동남쪽으로 무동산[일명 무등산]이 솟아 있고, 굴 앞 골짜기는 금성면 포전리까지 이어지는데, 이와 같은 주변의 지형지세와 식생 환경은 구석기 시대 이후 여러 차례 변화를 되풀이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자원의 보물 창고 동굴 유적]
동굴, 특히 석회암 동굴은 오래 전부터 고고학자들에게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고고학자들의 탐구 대상이 되기 전부터 아마추어 동굴 탐사단들이 꾸준히 동굴을 찾아다니며 동굴 안을 탐사하고 동굴 벽면에 남아 있는 인류의 흔적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일반 대중에게 동굴은 고고학과 함께 연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과 동물은 일찍부터 동굴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왔고, 그 결과 동굴에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점말동굴은 마을 사람들에게 ‘용굴’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동굴의 생김새가 용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굴 안에서 오래된 뼈들이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중국 베이징 근처 저커디앤[周口店] 동굴이 있는 뒷산을 용골산이라 부르는 것도 동굴 안에서 오래된 짐승 뼈들이 나온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같이 동굴 유적은 오랜 시간 쌓여진 유물들이 잘 남아 있어 고고학 연구 대상으로서 몇 가지 좋은 점이 있다. 먼저 닫힌 공간으로서 쌓임층이 오랜 시간 동안 비교적 안정적으로 남아 있음으로써 시간 서열에 따른 변화상을 읽는 데 유리하다. 또한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났던 옛사람들의 활동상을 집약하여 조사할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으며, 동굴에서 나오는 각종 동물 화석과 사람 뼈 등은 고환경 연구와 인류의 기원 및 이동 과정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하다.
연세대학교 박물관 동굴탐사단이 점말동굴을 처음 찾을 때부터 학계에서는 고고학적으로 많은 기대를 가졌다. 그리고 점말동굴은 그와 같은 기대를 저 버리지 않았는데, 동굴 안에서 나온 동물과 식물 자료들이 구석기 시대 자연과 인류 생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던 것이다. 특히 동물 뼈들 중 사슴 뼈는 종류별, 나이별로 다양한 구성을 보여 주었다. 연세대학교 박물관 동굴탐사단은 사슴과 짐승의 뼈대를 감정하여 꽃사슴, 우수리사슴, 말사슴, 노루, 고라니, 사향노루 등 모두 3아과 5속 5종 2아종의 사슴과 짐승을 확인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124마리 분의 뼈대가 나온 꽃사슴은 모두 같은 시기에 살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수십만 년 만에 빛을 본 선사 시대 동물들]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 주기에 맞춰 더운 기후와 추운 기후가 되풀이되었다. 지형 환경이 지금과는 달리 빙하기에는 바다 높이가 낮아져 서해는 육지로 중국과 이어지고, 동해는 커다란 호수로서 일본과 이어져 동물의 이동이 자유로웠다.
점말동굴에서 나온 동물과 식물 자료들을 봐도 지금은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 동물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원숭이·코뿔소·하이에나·사자 들은 따듯한 숲속 환경이나 초원 환경에서 사는 종들이며, 곰·사슴 등은 다소 추운 기후에 알맞은 짐승이다. 이들 짐승 화석이 점말동굴 안 쌓임층에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그 짐승들이 들어 있는 지층은 식물 자료들을 보아도 지금보다 춥거나 더운 기후 조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표-1〉에서 보듯 점말동굴에서 나온 동물·식물 자료들은 시기별 기후 조건을 반영하지만 빙하기와 간빙기의 조건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이에나는 따듯한 기후에 사는 종이지만 세 번째 간빙기에 나타나서 네 번째 빙하기에도 살았고, 곰은 추운 기후에 살지만 세 번째 빙하기부터 세 번째 간빙기를 거쳐 네 번째 빙하기까지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와 같은 중위도 지방은 기후 변화가 극한 상황을 보여 주기보다는 점이대로서 변화의 시간이 길고 다양한 생태 환경이 조성되면서 그에 따른 동물·식물상에서도 다양한 종적 구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또한 큰 젖먹이 짐승들은 그만큼 기후 적응력이 뛰어나 혹독한 변화 환경이 아니라면 생존을 계속할 수 있다.
점말동굴에서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동물과 당시에 자라던 식물들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점말동굴의 동물상 가운데는 이제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거나 멸종된 것들도 있다. 하이에나와 사자는 현재 아프리카 초원에서만 볼 수 있으며, 원숭이는 자연 상태에서는 아열대 지역까지만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다. 구석기 시대 점말 일대에 그렇게 많이 살았던 꽃사슴도 이제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사슴목장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정도이다.
[구석기 시대 점말동굴 풍경]
점말동굴이 있는 용두산 일원에서 조사된 현생 동물 종으로 포유류는 모두 9과 12종이 출현하는데, 멧토끼·등줄쥐·집쥐·고라니·멧돼지·너구리·족제비·멧밭쥐·생쥐 등과 야산에서 두더지·고슴도치·멧토끼·다람쥐·청설모 등이 출현하는 것으로 탐문 조사되었다.
식물상을 보아도 제천 지역은 석회암 지대의 토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식생을 보인다. 측백나무를 비롯하여 소나무·노간주나무 등 침엽수림이 발달하고, 회양목과 같은 관목성 상록수들도 드물게 있다. 그밖에 떡갈나무·물푸레나무·산뽕나무·소태나무·왕느릅나무·싸리 등이 함께 자라고 있으며, 희귀종으로서 줄대강나무·털생강나무·개부처손·바위손 등이 넓은 군락을 이루기도 한다. 이와 같이 현생의 식생 환경 및 동물상은 구석기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구석기 시대는 흔히 빙하기로 표현되듯이 오늘날보다 추웠던 시기들이 있었다. 또한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에는 간빙기라고 하여 지금보다 오히려 따듯했던 시기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 점말동굴 주변 풍경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포전(布田)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보듯이 점말동굴 앞으로는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평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동굴 앞으로 야트막한 구릉이 이어지고, 그 앞으로 펼쳐진 초원에는 꽃사슴·노루·고라니들이 뛰어 다니고, 동굴 뒤편에 솟아 있는 용두산과 멀리 송악산에는 소나무·신갈나무 숲에 호랑이·표범 같은 맹수들도 살았다.
점말동굴에서는 유난히 사슴 뼈들이 많이 나왔다. 사슴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은 먹잇감으로, 꽃사슴의 뼈대를 연구하여 나이를 추정해 본 바 두 살보다 어린 사슴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나 어린 사슴들이 좋은 사냥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슴은 사람뿐 아니라 다른 육식 동물들에게도 먹잇감이 되었을 터인데, 함께 나오는 호랑이·표범 들도 당시 사람들과 경쟁자로서 점말동굴 주변 숲과 초원을 무대로 살아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위가 물러가면서 점말동굴 주변의 식생이 아열대에 가까운 기후 조건으로 변하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코뿔소, 원숭이, 하이에나, 사자, 들소 등 따듯한 남쪽 지방에서 짐승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 당시에 자라던 식물들은 자료가 많지 않아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지만, 꽃가루 조사에서 확인된 ‘좀청미래’는 인도차이나 지역이 원산지로서 당시 기후 환경이 지금보다 따듯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다시 추위가 닥치고 2만 년 전쯤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추웠다는 빙하극성기가 되면서 점말동굴 일대는 냉온대성 식생 환경으로 변한다. 측백나무, 소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등이 우세한 숲속 환경에서 호랑이, 표범, 곰, 우수리사슴, 사향노루 등 추운 기후에 사는 짐승들이 주로 자리 잡았다. 앞선 시기에 보이던 코뿔소, 원숭이, 사자, 들소 등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짐승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 시기에 살았던 작은 짐승들은 갈밭쥐·옛비단털쥐 등 큰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추운 기후를 보여 주는 것들이 나오고 있다.
구석기 시대는 인류 문화의 여명기로서 문명 발달 정도가 낮고 기술이 낮은 단계에 머물러 사람이 자연에 적응해 가며 살았던 시기이다. 점말동굴에서 나온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당시 자연환경과 주변 풍경을 유추해 보면, 그때 사람들은 추위와 더위를 번갈아 겪으며 변해 가는 자연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처해 나갔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