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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653
한자 堤川德周山城
영어음역 Jecheon Deokjusanseong
영어의미역 Jecheon Deokjusansa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백종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3년 3월 30일연표보기 - 제천 덕주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제천 덕주산성 충청북도 기념물 재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1년연표보기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 지도보기
성격 성곽
양식 석성
크기(높이, 길이, 둘레) 15㎞[둘레]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석축 산성.

[개설]

제천 덕주산성이 있는 월악산은 남부 지방과 중부 지방을 가르는 천연의 분수령으로, 계립령(鷄立嶺), 조령(鳥嶺), 이화령(伊火嶺) 등 고대로부터 이용된 많은 교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계립령은 제천 덕주산성에서 남쪽으로 경상도와 통하고, 북쪽으로 남한강을 따라 충주와 서울에 이르기까지 통하던 중요한 교통로에 해당한다.

제천 덕주산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만 2670자이고,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하는 내용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이미 폐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 쓰여진 『호서승람(湖西勝覽)』에서는 제천 덕주산성이 난리 이후에 다 퇴락했다며 임진왜란 이전에 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혼(鄭混)의 『진재집(進齋集)』에 실린 한훤관방방략(寒暄關防方略)[1882]을 보면 계립령의 덕주산에 성(城)과 진(鎭)을 쌓아 전보다 더욱 견고하게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 중에 축성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면 첫째, 덕주사(德周寺)덕주공주(德周公主)가 피난했던 곳으로, 경순왕(敬順王)온조의 옛 성터인 이곳에 머문 적이 있다. 둘째 조선 중종 때 새로 내성(內城)[혹은 신내성(新內城)]을 쌓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무너진 상태이며, 충주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셋째, 고갯마루에 성을 쌓을 곳이 600~700칸에 불과하므로 내외 협축의 성을 쌓고 남북의 관문(關門)을 만들어 양쪽을 지키도록 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성의 초축은 백제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 중종 이전까지 3중의 성벽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시발(李時發)[1569~1626]의 『벽오유고(壁梧遺稿)』에 실린 월악산덕주산성문루상량문(德周山城門樓上樑文)과 이시발이 통정대부에 있을 때 찬획사로 조령을 방수하고 제천 덕주산성과 조령관문을 수축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6세기에 내성과 남북의 관성(關城), 성문 및 동문 등에 대한 창축(創築), 또는 신축(新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제천 덕주산성의 지표를 조사하였으며, 1992년 충주공업전문대학 박물관에서 보완 조사를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상성의 문지와 서쪽 성벽에 대한 정비 과정에서 시굴 조사 등이 이루어져 산성의 개략적인 현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1983년 3월 30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아직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조 시기를 편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4중으로 축조된 제천 덕주산성의 각 성벽은 각기 축조 시기가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즉 고려~조선 시대에 여러 차례 축성이 되었다. 축성과 관련한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시대의 고성(古城)이었다가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쌓았으며, 1598년(선조 31)에 정유재란에 대비하여 이시발이 수축하고 문루를 세웠다. 이후 1709년(숙종 35)~1710년(숙종 36)에 걸쳐 조령관문과 더불어 수축하여 왕의 피난처로 삼고자 하였으나 중단되었고, 1882년(고종 19)에 한원[하늘재]과 더불어 관방을 삼으려는 의논이 있었다. 1893년(고종 30)에는 경영을 위하여 수선을 시도하다 중지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발굴 조사를 통해 소백산맥을 넘어 계립령을 개척하고 활용한 측면에서 계립령로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보면 보다 구체적인 건립 경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치]

제천 덕주산성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송계계곡 일대에 위치한다. 제천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국도 36호선을 이용하여 충주로 진행하다가 지방도 597호선이 분기하는 탄지삼거리에서 송계계곡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6.5㎞ 정도 가면 덕주골휴게소가 나온다. 여기에서 영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덕주사가 나오고 100m 가량 더 가면 제천 덕주산성 동문에 이르게 된다.

[형태]

월악산 자락에 형성된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석축 산성으로, 전체 둘레가 15㎞에 이르는 거대 규모이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다양한 축조 방법으로 수축되어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 성벽은 계곡을 가로질러 축조되었으며, 성벽은 암벽에 닿아 있거나 암벽 사이까지 메워 쌓았다. 즉 암벽으로 벼랑을 이룬 험한 지형은 천연의 암벽이 성벽의 구실을 하고 인공적으로 축조된 석축 성벽은 능선부와 계곡부를 가로지르는 곳에 마련되었다.

[현황]

제천 덕주산성은 상성, 중성, 하성, 외곽성 등 4겹으로 축조되었다. 먼저 월악산 최고봉[해발 1,097m] 남쪽 해발 960.4m의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깊은 골짜기를 에워싼 내성(內城), 혹은 상성(上城)이 덕주사 마애 여래 입상이 있는 상 덕주사지 계곡을 에워싸고 있다. 상성은 남향의 가장 높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으며, 제1곽이다. 사방이 높고 험준한 산줄기와 천연 암반으로 가로막힌 까닭에 남쪽의 계곡 쪽 지형을 이용하여 계곡의 입구에 문과 수문(水門)을 만들었고, 가파른 암벽에 이어지도록 취약한 곳을 막아 석축 성벽을 쌓았다. 내성의 전체 둘레는 4㎞에 달하지만 인공의 석축은 650m 가량이다. 성벽의 외측 높이는 4m 이상이며 안쪽에서 바깥까지 원칙적으로 협축(夾築)한 상태로 미석(楣石)을 밖으로 10㎝ 가량 내밀어 쌓은 후 여장(女墻)을 축조하였다. 상성의 문지는 계곡부를 막아 할석으로 축조하였는데, 바닥 폭이 4.7m이고, 길이는 서쪽 측벽을 기준으로 8m이며, 문구부의 폭은 문확석을 기준으로 3.2m이다.

또한 덕주골이 있는 계곡에는 덕주사 서쪽에 동문(東門)이 있는데 이 문지에서 남북으로 이어진 성벽이 중성이며, 제2곽이다. 성벽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대략의 둘레는 7㎞가 넘는다. 성벽을 석축한 부분은 약 1.5㎞이다. 남쪽 성벽의 산 능선 암반 지역에 작은 망대(望臺)의 모양을 만들고 좁게 출입 시설을 설치하였다. 부분적으로 성벽이 붕괴되었으나 ‘철(凸)’형의 여장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동문의 바깥인 덕주골 입구에서 다시 성벽이 계곡을 가로지르는데, 이것을 차단성, 혹은 하성(下城)이라 하며, 제3곽이다. 중성에서 덕주골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면 수경대(水鏡臺)에 이르는데, 이곳에 남북으로 축조된 성벽이 있다. 덕주골 입구를 초입에서 막는 일종의 차단 시설로 판단된다.

끝으로 송계계곡 전체를 가로막아 남문과 북문으로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외곽 성인 제4곽이다. 제3곽보다 크게 남북으로 교통로를 막은 것은 남문과 북문인데, 이는 관성(關城)이라 할 수 있다. 남문은 덕주골 입구 남쪽의 망폭대(望瀑臺)에 있으며 북문은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구 동창마을에 있다. 두 관문(關門) 사이의 직선거리는 3.5㎞이다. 남문 안쪽에 남북 45m, 너비 최대 12m의 저수지가 남아 있는데 북쪽으로 물이 빠지는 수로가 있으며 수량이 풍부하다.

제천 덕주산성은 연차적인 보수, 복원 계획에 따라 북문, 남문 및 동문 등의 홍예문과 남·북 두 문의 문루가 복원되었고, 남문 동쪽의 성벽과 동문 남쪽의 성벽 일부가 복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천 덕주산성은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에 관문성의 형태로 축조한 산성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소백산맥의 월악산에 형성된 계립령로의 이삼중의 계곡부를 이용하여 축성된 산성이다. 이렇게 관액을 이용한 축성은 삼국 시대에 고구려에서 발전된 축성 방식의 하나로 주목된다. 또한 제천 덕주산성은 4중 구조의 독보적인 축조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조선 시대의 성곽 축조의 한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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