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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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周寺 |
영어음역 | Deokjusa |
영어의미역 | Deokjusa Temple |
이칭/별칭 | 상 덕주사,하 덕주사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미륵송계로2길 87[송계리 3]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정제규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 소속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587년(진평왕 9)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충주목(忠州牧) 불우조(佛宇條)에는 “전해오는 말로는 덕주부인이 이 절을 세웠으므로 그렇게 이름했다고 한다[德周寺在月岳山下 諺傳德周夫人建此寺 因名之]”라고 하여 창건과 관련된 또 다른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1632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승람(湖西勝覽)』, 1799년에 지어진 『범우고(梵宇攷)』, 역시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람고(伽藍考)』,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적에서 수습되는 석탑 기단 석재와 옥개석[지붕돌] 기와편 등 유물의 상한선이 고려 초기를 넘지 못하는 점을 볼 때 창건 시기는 고려 건국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 시대 덕주사의 경영과 관련한 기록 「증지수좌관오묘지명(證智首座觀奧墓誌銘)」을 보면 관오(觀奧)[1096~1158]의 원당으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스님도 이미 국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므로 이에 보답코자 특별히 안성군에 바라밀사를 창건하여 낙성을 보았다. 이를 왕에게 아뢰자 임금께서 크게 가상하게 여겨 십육나한상을 보내어 법당에 봉안하였다. 이에 스님은 口口사와 원당인 충주 덕주사에 산승을 소집하여 항상 국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성도량을 설치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 시대의 덕주사가 증지수좌(證智首座) 관오(觀奧)[1096~1158]를 중심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성도량(祝聖道場)이 베풀어졌던 원당(願堂)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고려 시대 덕주사의 경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로 하 덕주사에서 발견된 「덕주사금구(德周寺禁口)」가 있다. 이곳에는 사력(寺歷)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어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명문의 내용은 “태화 6년 병인년 8월 21일에 상 덕주사 금구 하나를 만든다. 중량은 13근이다. 동량도인은 계안, 료한이다. 직장 송공후가 기록한다.[泰和六年丙寅八月二十一日造上德周寺禁口一坐重什參斤棟粱道人戒安了閑新主直長宋公侯記結]”라고 하여 당시 덕주사에서 활약했던 승려와 불사에 참여하였던 지역의 유력한 인물 그리고 이미 1206년에 덕주사를 상 덕주사와 하 덕주사로 구별하고 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덕주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정혼(鄭混)의 『진재집(進齋集)』에 수록된 기록이 전해진다. 이곳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한훤관방방략(寒暄關防方略)」에는 “덕주하사(德周下寺)를 승통소(僧統所)로 하여 삼남(三南)의 승군(僧軍)을 번갈아 교대로 지키게 하며, 여기에 드는 비용은 삼남의 사찰마다 나누어 내도록 하며, 산의 북쪽에 있는 신륵사(新勒寺)와 보광암(普光菴)의 불상을 이곳으로 옮겨 모시고, 두 절에 소속된 전답과 덕주하사(德周下寺)의 전답으로서 먼 곳에 있는 것을 가까운 곳에 있는 것과 서로 바꾸게 하여 번드는 군사로 하여금 경작하여 둔전(屯田)의 예처럼 하여 양곡을 마련하게 한다.”는 내용과 “덕주상사(德周上寺)를 수리하여 된장과 소금을 많이 예비하는 일을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예와 같이 한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1800년대 후반까지 덕주사가 국가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기능을 갖춘 사원으로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덕주사에 현존하는 조선 시대 4기의 부도 가운데 그 행적이 비교적 상세한 것은 환적당(幻寂堂) 의천(義天)[1603~1690]이다. 의천의 자는 지경(智鏡)이다. 속성은 문씨(文氏)로 선산(善山)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의 진정(塵靜) 탁린(琢璘)의 문하에 들어가 1618년(광해군 10)에 구족계를 받았다. 1631년에 금강산에 들어가 편양(鞭羊) 언기(彦機)[1581~1644]의 법을 이어 받았다.
의천은 풍담(楓潭) 의심(義諶)[1592~1665]과 함께 언기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 이해되고 있다. 언기는 청허(淸虛) 휴정(休靜)[서산대사, 1301~1382]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 태고 보우로부터의 선맥(禪脈) 계승을 주장하였던 스님이다. 이로 볼때 조선 시대의 덕주사는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에 근거를 둔 언기 문하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전각은 6·25 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가 1963년에 지암 권정철이 지금의 덕주사를 중창하였다. 이후 1970년에 박해찬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85년에 성주가 중건하였다. 당시 한수면 역리에 있던 석조약사여래입상을 이전하여 지금의 약사전에 봉안하였다. 1998년에는 청하 성일이 주석하면서 대웅보전을 새로 건립하였고, 2007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원경이 주석하고 있다. 2009년 화재로 일부 전각이 불타 2011년 현재 복원 공사를 진행중이다.
[활동 사항]
덕주사는 정기적으로 법회와 기도회를 열고 있다. 또한 사찰 내에 불교대학을 개설하여 신도의 교육에 힘쓰고 있다. 불교대학은 연중 3개월 과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2007년 9월부터는 의료 봉사 단체인 약사보리회를 중심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지역 주민들을 위한 한방, 내과, 미용 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야생 테마파크와 어린이 여름 수련회 등을 매년 운영하고 있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현재 덕주사의 인원 구성은 승려 3명, 보살 5명이며, 신도 수는 2,500여 명이다. 사찰은 계곡 서쪽의 높은 토단 위에 남북 방향으로 길게 조성되었다. 초입의 서쪽 상단에 대웅전이 있고, 남쪽에 산신각, 북쪽으로는 약사전, 관음전, 요사채, 부도밭 등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상덕주사에는 극락전이 있다.
[관련 문화재]
관련 문화재로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06호], 제천 덕주사 석조약사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196호], 고려 시대 석탑 부재, 조선 시대 부도군 등이 있다. 조선 시대 부도 4기는 환적당 부도(幻寂堂浮屠), 부유당 부도(浮遊堂浮屠), 용곡당 부도(龍谷堂浮屠), 홍파당 부도(洪波堂浮屠)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