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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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容八 |
영어음역 | Won Yongpal |
이칭/별칭 | 원용석(元容錫),복여(復汝),삼계(三戒)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초명은 원용석(元容錫), 자는 복여(復汝), 호는 삼계(三戒).
[활동 사항]
원용팔(元容八)[1862~1906]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이호(梨湖)에서 무장의 후예로 태어났으며, 이근원과 유중교(柳重敎)에게 나아가 배웠고 장담에도 드나들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의병이 일어날 때 여주에서 봉기한 심상희 부대의 후군장으로 활약하면서 열한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제천 의병과 심상희 의병의 연합을 위한 연결 고리 구실을 하였다. 심상희가 의병 해산령에 따라 해산한 후로는 제천 의병으로 옮겨 한때 최고의 실무 책임자인 중군장을 맡기도 하였다.
제천 의병이 제천을 빼앗기고 서행할 때에는 상소문을 올리려 상경하였으며, 의병에게 죽은 단양군수 권숙의 아들이 복수를 위해 유인석(柳麟錫)을 해치려 하자 의리로 타일렀다. 그 후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던 원용팔은 1905년(고종 42)에 이르러 일제의 노골적인 국권 침탈에 분개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주천에서 봉기한 부대는 을미 의병 기간 호좌의진의 근거지인 제천을 비롯한 사군 지방[제천·청풍·단양·영춘]과 영월·정선·평창·강릉·홍천 등의 관동 지역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집안과 관련이 있어 안면이 있던 원주 진위대 중대장 김귀현도 내응을 약속하였다. 호남의 기우만에게도 서신을 보내 호응을 청하였고, 서북 지방에서 강학에 열중하던 유인석에게도 글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유인석은 신중론을 취하였고, 신식 군대를 믿을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원용팔의 의병은 일진회 회원을 처단하고 통신선을 끊으면서 일본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본은 한국 정부에서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직접 병력을 동원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결국 원용팔은 원주의 배신으로 원주의 궁곡[현 원주시 지정면 판대리]에서 체포되었다. 동지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원용팔이 체포된 곳에 대해서는 『황성신문』과 『회당집』 「여원서암서(與元恕庵書)」, 『동고록(同苦錄)』 「송운행적(松雲行蹟)」, 『매천야록』 등에는 횡성에서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지에서 활동한 동료 박정수의 『의사원용팔을사의병사(義士元容八乙巳義兵史)』에는 원주 궁곡을 지나 이튿날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로 압송되어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때 심문하는 왜장과 관원을 꾸짖고 일본인이 주는 음식을 거절하였으며, 일본군 사령관이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즉시 방면하겠다고 회유하자 풀려나 동대문 밖에 나가면 바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강한 항일 의지를 표명하였다고 한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던 원용팔은 이듬해 봄에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죽음을 예감한 원용팔은 “내가 죽어 벼락 귀신이 되어서라도 왜놈을 치는 사람을 돕겠다”라고 맹세하였다.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동지들이 잇달아 의병을 일으키면서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하는 후기 의병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