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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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麟錫 |
영어음역 | Yu Inseok |
이칭/별칭 | 여성(汝聖),의암(毅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아버지는 유중곤(柳重坤)이다. 14세에 종숙인 유중선(柳重善)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유인석(柳麟錫)[1842~1915]은 춘천의 가정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이항로(李恒老)·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 화서학파 거유들에게 차례로 배웠다. 스승인 유중교가 말년에 강학하던 제천의 장담에서 별세한 이후로는 동문들을 이끈 유학자이다. 을미년 말에 단발령이 있은 후, 장담 선비들과 더불어 처신 방법을 두고 논의한 결과 의병을 일으키는 길, 망명하여 도를 지키는 길, 자결하거나 은거하는 길 세 가지 노선을 정리하고, 자신은 망명하여 도맥(道脈)을 지키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안승우(安承禹)·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 등 여러 문인 사우들이 봉기하자 이를 후원하였고, 후에는 대장으로 추대되어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영월에서 등단한 유인석은 곧장 제천을 장악하고, 개화 정부의 명을 받드는 지방관들을 처단하여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베는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기세를 올렸다. 이후 친일 정책의 지방 거점인 충주관찰부를 공략하고, 충청남도·영남 지방까지 병력을 파견하여 친일 지방관을 처단하였으며, 영남 일곱 고을의 의병을 모아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여 이름을 떨쳤다.
이로써 다른 지역의 의병 봉기를 자극하였고,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의병 부대들이 제천으로 달려와 대규모 연합 의진을 결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돌아온 호좌의진은 이후 9개가 넘는 주변 고을을 장악하여 사실상 군정을 시행하였다. 지방관을 몰아내거나 굴복시키고 각 고을에 지방관 대신 수성장(守城將)을 임명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의병 투쟁에 동원하는 한편, 가흥과 수안보에 자리 잡은 일본군의 병참을 공격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결국 장기렴의 관군 군대에게 패하여 근거지인 제천을 내주었고,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서북 지방에서 재기하기 위하여 서행(西行) 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서상렬 같은 핵심 간부를 잃고, 서북 지역에서 재기도 여의치 않아 결국은 압록강을 건너 망명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 항일 운동 근거지를 만드는 데 힘써, 이는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첫걸음이 되었다.
한때 귀국하여 강학 활동을 하면서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척사적 성격을 띤 향약을 시행하였고, 1905년과 1907년 이후에는 그와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던 동지들이 제천을 중심으로 전개한 의병 활동을 여러모로 지도하고 후원하였다. 정미 의병이 좌절된 이후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지사들과 협력하여 의병을 양성하고, 십삼도의군을 조직하여 도총재로 활동하다가 만주로 이주하여 살다 1915년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 시문집인 『의암집(毅庵集)』이 있다. 『의암집』은 유인석이 세상을 떠난 2년 뒤 이진식, 백삼규 등이 유고를 모아 1917년 만주에서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