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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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弼熙 |
영어음역 | Yi Pilhui |
이칭/별칭 | 만여(萬汝),실곡(實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
[활동 사항]
이필희(李弼熙)[1857~1900]는 단양의 품달과 여주에 살았다. 무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유중교(柳重敎)를 만난 후 유학에 전념하였다. 을미년(1895)에 단발령 조치가 내려진 후 장담에서 처신을 두고 의병을 일으킬 것인가, 망명할 것인가, 자결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을 때 의병 봉기를 주장하였다.
얼마 후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 등이 지평의 포군으로 조직된 의병 부대를 거느리고 원주의 안창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천으로 들어왔을 때 여러 장담의 선비들과 함께 달려가서 맞았고, 이어 대장으로 추대되어 ‘제천 의병 대장 이필희’의 이름으로 팔도에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단양의 장회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포군들이 흩어지면서 의진이 무너져 곤경에 처하자, 유인석(柳麟錫)의 휘하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부군사(副軍師)·진동장·별모장 등의 자격으로 원주를 주 무대로 하여 병력을 모으고 훈련시켜 제천의 본진을 뒷받침하는 일을 하였으며, 아울러 친일 관료를 베고 충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주변 여러 고을을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호좌의진이 충주에서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제천을 빼앗기고 재기를 위한 서행을 단행할 때, 정화용과 더불어 서북 지방으로 달려가 의병을 재기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마련하려고 애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인석이 만주로 건너갈 때 좇았으며, 그곳에서 중국에 원병을 청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에 가서 공자의 화상을 모시고 성묘를 세우는 등 유인석을 받들어 유교 문화를 보존하는 노력을 기울이다가, 1900년(고종 37) 만주 회인현에서 퉁자강[佟佳江]을 건너다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