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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96
한자 白南奎
영어음역 Baek Namgyu
이칭/별칭 남수(南壽),운암(雲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2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7년 2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70년연표보기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남수(南壽), 호는 운암(雲庵).

[활동 사항]

백남규(白南奎)[1884~1970]는 충주시 금가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무관 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고, 안동 분견대의 부위(副尉)로 있다가 부대를 이탈하여 의병 봉기를 꾀하던 이강년(李康秊)에게 의탁하여 의병 항쟁에 몸을 던졌다. 1907년(순종 1)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 등으로 촉발된 정미 의병 기간에 이강년 부대의 우선봉 또는 도선봉으로서 천남·갈평·영월·싸리재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백남규는 신식 군사 교육을 받은 핵심 간부의 한 사람으로 중요한 전투마다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해 말 일본군의 집요한 공세에 밀려 이강년 부대가 복상골 전투에서 치명적 피해를 입고 북상하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대신 남쪽에 남아 영남과 호서 사이에서 병력을 모았고, 이듬해 봄 다시 남하한 이강년의 본진과 합쳐 서벽·재산 지구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강년이 일본군에 체포된 후, 백남규는 일정한 병력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1909년 12월 일제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8년간에 걸친 옥살이를 하였다. 특사로 풀려난 후, 단양 일대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여의치 않자 중국 상하이로 가려다가 1917년 2월 음성에서 다시 붙잡힌 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15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노선에 따르지 않았으며, 김구가 암살된 후에는 야인으로 남은 생을 보냈다. 옛 동지 권용일(權用佾)과 함께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 편찬 사업에 필요한 경비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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