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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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康秊 |
영어음역 | Yi Gangnyeon |
이칭/별칭 | 낙인(樂仁·樂寅),운강(雲崗·雲岡)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仁·樂寅), 호는 운강(雲崗·雲岡). 아버지는 이기태(李起台)이다.
[활동 사항]
이강년(李康秊)[1858~1908]은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태어났다. 1880년(고종 17) 3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청 선전관이 되었으나, 개화 정책에 불만을 갖고 낙향한 이후 잠시 동학 조직과 관련한 의병을 이끌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이어지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 관찰사 김석중을 죽여 기세를 떨쳤으나, 곧 패하고 제천의 호좌의진(湖左義陣)으로 들어와 유격장이 되었다.
이후 덕산의 동창과 조령 일대를 주요 활동 무대로 하여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는 한편, 영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상렬(徐相烈) 부대를 엄호하였으나 수안보를 공격하면서 호응하기로 한 전군의 작전이 원활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후에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이 충주 쪽에서 공격해 와 호좌의진의 근거지인 제천을 위협하자 청풍 쪽을 방어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제천을 빼앗긴 후로 서북쪽을 향하는 본진을 따르지 못하고 소백산에 들어가 해산하였다.
이듬해 요동으로 가서 유인석(柳麟錫)을 좇았고, 단양 금채동[현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상원곡리 김치골]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동문들이 『화서집』을 간행할 때 적극 주선하였다. 1905년 원용팔(元容八)이 봉기하였을 때는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곧 재기하여 1907년(순종 1)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때를 즈음하여 윤기영(尹起榮) 등과 의병을 크게 일으켰다. 제천으로 몰려든 여러 의진과 함께 제천의 천남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이후 김상태(金尙台)의 강력한 추대에 의하여 을미 의병 당시의 호좌의진을 재건하여 대장에 올랐다.
이후 이강년의 의병 활동은 후기 의병전의 특징이기도 한 유격전 양상을 띠었다. 갈평, 싸리재, 영월, 죽령 등 소백산을 중심으로 험준한 산악 지대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전투 의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해 말로 접어들면서 일제 탄압이 강화되고, 탄환 공급이 달리면서 이강년 의진은 곤경에 처하였다. 특히 복상골 전투에서 많은 장졸이 체포되고 전사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후로는 의진을 급속히 북쪽으로 옮겨 가평 화악산 일대로 이동하였다.
이는 이인영(李麟榮)이 주도하는 서울 진공 작전에 부응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시도이었다. 경기도 가평군 일대에서 겨울을 넘기고 난 뒤, 이듬해 봄 그곳을 떠나 영동 지역을 거쳐 다시 제천 일대로 내려왔다.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역인 서벽·재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나, 의진의 세력은 날로 떨어졌다. 결국 그해 7월 2일 청풍 작성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10월 13일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