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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98
한자 李容兌
영어음역 Yi Yongtae
이칭/별칭 단암(檀菴)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2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50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64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2006년연표보기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광동
성격 독립운동가|종교인
성별
대표 경력 대종교 경의원장

[정의]

일제 강점기 제천에서 활동한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용태(李容兌)[1890~1964]는 호는 단암(檀菴)이며, 충주시 산척면 광동 출신으로 어려서 봉양으로 이사하였다. 임의상(林宜常)·이소응(李昭應) 등 화서학파 학자들에게 배웠으나 나라가 망한 후로는 구학문으로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개혁에 뜻을 두었다. 24세 때 근좌면 면서기로 공직에 나섰으며, 1920년에는 봉양면에 모범서당을 세웠다. 이후 소작인회·봉양농업조합을 설립하여 농민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고, 모범서당을 기초로 하여 봉양보통학교 인가를 받는 등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1923년 봉양면장이 되어 4년간 근무하다가 사직하였다. 30대 후반에 접어들어 대종교에 귀의하는 한편, 금광업에도 투자하였으나 별다른 이익을 얻지 못하였다. 1934년 백운면장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1939년 일찍이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투옥된 아우 이용준(李容俊)을 면회하기 위하여 만주로 가서 교주 윤세복 종사에게 배움을 얻고 귀국하였다.

이후 대종교의 참교(參敎)와 지교(知敎) 등 간부직을 역임하다가, 1942년 12월 윤세복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붙잡혀 8년형을 선고받고 목단강(牧丹江) 액하감옥(液河監獄)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대종교 일에 전념하며 상교(尙敎)·경의원장(經議院長)을 역임하였고,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자유당의 지방 조직을 맡아 정당 활동을 하면서 대종교의 전범(典範)·전리(典理)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97년 아들 이영재(李榮載)와 제자 김일수(金一洙)가 중심이 되어 간행한 『단암이용태선생문고(檀庵李容兌先生文稿)』가 있다. 이용태는 『봉양면지』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2006년 박달재 정상에 흉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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