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6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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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宅告祀 |
영어음역 | Antaekgosa |
영어의미역 | Shamanist Rite to Appease The Household God |
이칭/별칭 | 집안떡 해 먹는다,집안 한다,안택 한다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선영 |
[정의]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음력 1월과 10월에 집안의 안녕을 비는 의례.
[개설]
안택고사는 각 가정에서 음력 정월 또는 시월에 날을 잡아 집안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올리는 가정의례이다. 제천 지역에서는 안택고사를 주로 “집안떡 해 먹는다.” 또는 “집안 한다.”, “안택 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지역에서는 정월 보다는 주로 시월에 안택을 하는 편이다. 한 해의 수확을 마쳤기 때문에 거두어들인 햇곡식으로 당연히 떡을 하여 집안의 여러 가신(家神)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더불어 이때 가신의 신체인 단지 안의 쌀도 수지로 바꾸고, 성주를 새로 받기도 한다.
[연원 및 변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 상원조에는 “소경을 불러다가 보름 전날부터 안택경을 읽으며 밤을 새운다. 액을 막고 복을 비는 까닭이다. 정월이 다 가도록 계속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시월 월내조에는 “민가에서는 10월을 상달[上月]로 여기고 무당을 데려다가 성주신을 맞이하여 떡과 과일을 진설하고 기도함으로써 안택을 바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시대부터 정월과 시월에 안택고사가 널리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제천 지역에서는 안택고사를 하는 시기가 주로 시월에 집중되어 전해져 왔다. 하지만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국가 정책으로 전국에 시행되면서 민간의 여러 신앙들이 미신으로 치부되어 소멸되었다. 또한 기독교의 확산으로 인해 더더욱 가정 신앙이 빠르게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의 과정 속에 안택고사 또한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지금은 금줄을 치고 안택고사를 하던 과거의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여전히 농사를 생업으로 하고 있는 제천의 많은 가정에서는 수확한 햇곡식으로 떡을 하여 집안 곳곳에 잠시 두는 것으로 안택을 이어가고 있다. 또는 더 간소화되어 제천시 청풍면 장선리의 한 가정에서는 햇곡식으로 밥을 지어 물과 함께 장독대에 갖다 두는 것으로 안택을 대신하고 있다.
[절차]
무당을 청해 안택을 하는 것과 부인이 스스로 안택을 할 때는 그 절차가 약간 다르다. 무당을 청할 때는 제물을 푸짐하게 더 많이 차리고, 절차가 길어진다. 부인이 할 경우에는 간단히 제물을 차리고 비손하는 것으로 마친다.
안택을 할 때 차리는 음식으로 가장 정성을 드려야 하는 것은 떡시루이며, 이는 어느 집에서고 빠지지 않는 제물이었다. 떡시루의 종류는 팥을 섞어 찐 ‘케떡[팥시루떡]’, 찹쌀과 콩을 섞어 찐 ‘마구설기’, 쌀만 갈아 하얗게 찐 ‘백시루’ 등 세 가지인데, 집안에 따라 세 개 또는 다섯 개를 준비한다. 시루를 놓는 장소는 조상, 성주, 터주 세 곳이다. 하지만 안택고사는 가가례(家家禮)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각 시루를 놓는 장소는 집안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의 한 가정의 경우 조상께 ‘케떡’과 백시루, 성주에 백시루, 터주에 마구설기를 놓았으며, 또한 조왕에 별도로 백시루를 놓았다. 이외의 제물로는 삼색실과, 포와 술을 준비하며, 탕과 물을 한 그릇 올린다. 집안에 따라 메를 지어 올리기도 한다.
안택고사의 절차는 우선 방안에 제물을 차리고 비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조상께 비손을 하고, 성주-터주-조왕 등의 순서로 정성을 드린다. 그리고 집안에 따라 용왕에 비손을 하기도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과거 안택고사에 정성을 다할 때는 ‘삼일 기도’를 드린다고 하여 정성드릴 날을 잡으면 삼일 전에 집 대문에 금줄을 치고 대문 앞에 황토를 폈다. 그리고 삼일 동안 부정한 것을 보지도 않고 수신(修身)했다. 부인은 고사 당일 떡시루를 찔 때 특히 정성을 다했다. 불을 지피면서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떡을 찌는 부엌 근처로 도랑을 건넌 사람이 오면 떡이 안 익고 내불기[설익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