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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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統一-主役金庾信將軍-魂-鎭川吉祥祠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508[문진로 1411-38]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영범 |
[개설]
진천 길상사(吉祥祠)는 흥무대왕 김유신(金庾信)[595~673]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진천읍 벽암리 508번지[문진로 1411-38]에 있으며, 진천군과 김해김씨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1975년 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오르면 입구의 홍살문과 본전인 흥무전(興武殿)을 비롯하여 관리사·내삼문·협문 등 모두 6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흥무전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벽면과 기단 등을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목조 건물이다. 안에는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가로 98㎝, 세로 187㎝의 영정이 있는데 1976년 11월 5일 봉안하였다. 뒤뜰에 1957년 세운 흥무대왕신성비, 안뜰에는 1976년에 세운 김유신장군사적비, 입구에는 길상사중건사적비 등이 있다.
[문헌으로 보는 진천 길상사의 역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충청도(忠淸道)」 ‘진천현’ 조에 길상사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신라 진평왕 때 만노군 태수 김서현(金舒玄)의 아내 만명(万明)이 아이를 밴 지 스무 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 태를 현의 남쪽 15리에 묻었는데, 화하여 신(神)이 되었으므로 태령산이라 하였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두고 나라에서 봄가을에 향(香)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행하였다. 본조 태조 무인(戊寅)에 이르러 비로소 국제(國祭)를 정지하고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속칭 태산(胎山)이라 한다[新羅眞平王時 萬弩郡太守金舒玄之妻萬明姙身 二十月生子 名曰庾信 藏胎於縣南十五里 化爲神 因號胎靈 自新羅時置祀宇 春秋降香行祭 高麗因而不革 至本朝太朝戊寅 始停國祭 令所在官行祭 俗稱胎山].”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충청도」 ‘산천’ 조와 ‘사묘’ 조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길상산(吉詳山)은 또 하나의 이름이 태령산이다.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보련산과 서로 연했다. 신라 진평왕 때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아내 만명이 아이를 밴 지 스무 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유신이다. 태를 이 산에 묻어 두었기 때문에 길상이라고 이름 했다.”, “김유신사(金庾信祠)는 길상산에 있다. 신라 때에 사우를 세우고 봄가을로 향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시행하다가 본조 태조 8년에 이르러 비로소 중지시키고 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당이 불타 없어졌다가 1851년(철종 2) 정재경·박명순(朴命淳) 등이 백곡면에 죽계사(竹溪祠)를 다시 세우고 조감(趙感)과 함께 김유신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866년(고종 3) 진천읍 벽암리 소흘산(所訖山) 아래 서발한사당(舒發翰祠堂)을 다시 세웠으나 1922년 대홍수로 무너졌다. 1926년 후손 김만희(金万熙)의 주선으로 지금의 자리인 벽암리 도당산성(都堂山城) 안에 길상사를 건립하였다. 6·25전쟁 때 심하게 파손되어 중수하였고, 1976년 사적지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전면 신축되어 오늘에 이른다.
[길상사와 김유신]
길상사는 진천읍에서 옛 도로를 따라 청주 방향으로 1.2㎞ 남짓 가다 잣고개 중턱 도당산 아래에 자리 잡은 사당으로, 1864년부터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 내외와 아들 원술 내외 등 4위의 목형 화상(画像)을 모셨던 곳이다. 이곳에 사당을 세우게 된 재미있는 내력이 전해 온다.
길상사는 원래 잣고개와 용소마을 중간 지점에 있었다. 나라에서 제사지내던 이 사당 앞을 지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만약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말굽이 그 자리에 붙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 해 충청감사가 진천 고을을 거쳐 이곳을 지나던 중 말을 탄 채 그대로 지나가려 했다. 하인이 하마(下馬)를 간청하였으나 “충청감사가 행차하는 데 무슨 헛소리냐!” 하며 그대로 말을 몰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말이 사당 앞에 이르자 과연 네 말굽이 땅에 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감사는 말에서 내려 애꿎은 말의 목을 베어 사당 안에 있는 장군의 화상에 온통 피를 묻혀 놓고 그곳을 떠났는데, 멀리 가지 못하고 지금의 성암마을 앞에 있는 개울을 건너다 일행과 함께 빠져 죽고 말았다.
그날 밤 진천현감이 잠을 자는데 꿈속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김유신이오. 무례한 충청감사란 자가 내 집과 몸을 더럽혀 살 수가 없으니 현감이 사당을 다른 곳으로 옮겨 주시오.”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만 소생이 어디가 좋은 곳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일 아침 등청하는 대로 동현 앞에서 백지 두 장을 띄워 그것이 떨어지는 곳에 사당을 지어 주시오.”
이튿날 아침 진천현감이 등청하여 백지 두 장을 띄우니 한 장은 하늘 높이 올라가 사라지고 한 장은 낮게 떠 가다가 당재 터에 내려앉았다. 그리하여 그곳에 사당을 짓고 장군 내외와 아들 내외의 목형 화상을 모셨는데, 인근 주민들이 그 영험을 믿고 수시로 찾아와 치성을 올려 당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한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김유신은 595년(진평왕 17) 지금의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서 만노군[진천의 옛 이름] 태수 김서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때문에 지금도 상계리 곳곳에는 김유신과 관련한 유적이 있다.
계양마을 입구의 장군 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에 1983년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인 연보정(蓮寶井)이 있다. 또 태령산[421m] 정상부에 쌓은 둘레 약 216m, 높이 1~1.3m의 테뫼식 석축 산성인 태령산성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있다.
김유신에 대한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파한집(破閑集)』,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동국통감(東國通鑑)』,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東京雜記)』와 조선시대 개인 문집 등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열전」 10권 중 맨 앞의 3권을 독차지할 만큼 풍부한 전기 자료가 실려 있다.
김유신은 15세에 등용문인 화랑으로 뽑혀 낭도들과 함께 몇 해 동안 수련 생활을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검(劍)을 닦고 술(術)을 얻어서 18세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642년(선덕여왕 11) 신설된 압량주[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상장군에 올라 낙동강을 건너 백제 일곱 성을 크게 격파했다. 645년에는 백제의 대군이 밀려오자 다시금 강을 건너 백제군의 머리 2,000급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다.
648년(진덕여왕 2) 대야성 탈환에 나서 백제군과 두 차례 크게 싸워 21개의 성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김유신은 승리한 공로로 소판에서 이찬으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무열왕계가 왕위에 오르자 김유신계도 기반을 튼튼히 다지게 되면서 이제 김유신은 김춘추(金春秋)와 함께 신라 정치를 지배하는 주역으로서 당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660년(무열왕 7) 정월 상대등이 되었고, 나당 전쟁이 한창이던 673년(문무왕 13) 7월 1일 79세로 세상을 떠나 금산원(金山原)[지금의 경주시]에서 장사지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배향하였다.
[혈통도 막지 못한 사랑의 결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진흥왕(真興王)의 아우인 김입종(金立宗)의 아들 김숙흘종(金肅訖宗)의 딸 만명을 우연한 기회에 길에서 만나 눈짓으로 꾀어 중매도 없이 야합하였다. 김숙흘종은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할 때에야 비로소 딸이 야합한 것을 알고 다른 집에 딸을 가두고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벼락이 그 집 문간을 때리니 지키는 사람이 놀란 틈을 타서 만명이 들창문으로 빠져나와 드디어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향할 수 있었다. 혈통을 존중하는 엄격한 신라 왕실이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훗날 김서현이 높은 벼슬과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이라는 중직을 맡게 된 것도 이 일이 인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유신의 탄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김서현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熒惑)[화성(火星)]과 진성(鎭星)[토성(土星)]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아이가 금갑(金甲)을 입고 구름을 타고 당중(堂中)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후에 임신하여 스무 달 만에 아기를 낳았다.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김서현이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에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으로 이름을 지어야겠소. 그러나 예법에 일월로 이름을 짓지 않는다 하니 지금 경(庚)은 유자(庾字)와 서로 같고 진(辰)은 신(信)과 소리가 서로 가깝소. 더구나 옛날 어진 사람에게도 유신(庾信)[중국 북주 사람]이라고 했으니 어찌 그렇게 이름 하지 아니 하리오?” 하고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
[화랑도는 살아 있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화랑은 민간 주도로 조직되고 자주적·민주적으로 운용되었으며, 그 정신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전통이 되어 민족사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이 조선 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하면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한가지인 우책(愚策)이다.”라고 말했을 만큼 화랑의 정신을 높이 샀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세운 김유신 역시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8세에 국선이 되었다. 김유신의 탄생지인 진천읍 상계리에는 화랑의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해 ‘화랑무예태권도성지’를 조성하였으며, 김유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길상사 또한 순수한 화랑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