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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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음역 | yeoksa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역사.
[개설]
진도는 반도의 서남쪽 모서리에 위치하여 작게는 서남해 섬 지역과 섬 지역, 그리고 크게는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지도를 펴놓고 고대 한·중·일 삼국을 연결했던 바닷길이 지나는 중요한 길목들을 살펴보면, 서해로는 흑산도가 먼저 상기되고 영산강과 연결하여서는 목포와 영산포가 돋보인다. 그리고는 해남의 화원반도와 진도가 마주보는 길목으로 우수영과 명량(울돌목)이 있고, 여기를 지나면 해남과 완도가 연결되는 이진과 달량진(현재의 해남군 북평면)이 있다. 이 해로에서 제주로 연결되는 두개의 길이 있었으니 진도의 남도포진과 탐진만 끝의 마량포구가 그곳이다.
한국의 전근대사에 있어서 진도와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가로지르는 이 해로는 역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했고, 진도지역으로 하여금 남다른 역사적 경험을 하게 하였으니, 특히 명량해협을 무대로 이루어진 한국의 역사, 진도의 역사 흔적들이 그를 말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왕건과 견훤 간의 쟁패, 고려시대의 삼별초항쟁,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왜구 침탈, 임진왜란·정유왜란과 같은 내우외환의 전란 과정에서 쟁패의 중심지로 부각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명량해협을 포함하여 한반도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는 고대사에서는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한 국제문화의 주요 이동로였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조운로(漕運路)로써 그 의미가 돋보여지는 바닷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입지적 조건으로 진도의 문화는 중층성과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진도의 문화는 남해안 문화와 서해안 문화가 어떻게 교류·교차·융합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한다.
[고대]
백제시대 진도에는 군내면 일대의 도산현(徒山縣), 고군면 일대의 인진도군(因珍島郡), 임회면 일대의 매구리현(買仇里縣)이 있었다. 물론 이들 3개의 군현은 독립적인 행정 편제를 지니고 있었지만, 인진도만이 군(郡)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역시 고군면 일대가 상대적으로 중시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 명량해협의 입지적인 조건과 관련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진도의 정치·문화적 위상은 명량으로 대표되는 고대 해로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이러한 판세는 변화된다. 즉 통일신라가 되면서 이들 3개 군현은 도산현이 뇌산군(牢山郡)으로, 인진도군이 진도현(珍島縣)으로, 매구리현이 섬탐현(贍耽縣)으로 각각 이름을 바꾸면서, 군내면 지역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면서 매구리현(지산, 임회) 지역까지 영속현으로 삼고, 인진도군은 진도현으로 격이 하강되면서 무안군의 영속현이 된다. 다시 말하면 과거 상대적으로 중시되어 진도지역의 주도권을 지녔던 고군지역이 주도권을 잃고, 대신 군내지역이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물론 고군지역과 군내지역의 세력이 이처럼 변화된 정확한 이유를 현존 자료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한 당시 진도현과 멀리 떨어져 있던 무안군이 진도현을 어떻게 관할하게 되었느냐 하는 점도 문제이다.
그러나 앞서의 내용을 추측해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무안군은 백제시대에 비하여 군세가 크게 부상하였고, 이러한 변화와 함께 고대 해로의 요충을 무안군이 장악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어, 내부의 문제보다 외적인 영향의 결과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대체로 군내지역은 친백제적인 성향이 온존되었으며 고군지역은 통일기의 변화를 현실로 수용하는 친신라적인 변신을 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진도의 유력 성씨 중에 무안박씨가 세력을 떨치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전 시기의 연고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청해진대사 장보고는 주로 완도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활약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청해진을 거점으로 하는 장보고의 해상세력이 기반으로 삼은 것은 중국~신라~왜를 연결하였던 고대 무역로였고, 바로 이곳 명량해협은 그 무역로가 통과하는 큰 길목이었다. 뒤이어 선종의 발달과 고려의 청자문화가 중국의 강남지방 도자문화와 연계되면서 발달되었던 것도 모두 이 해로를 이용하여 이루어진 문화상들이었다.
[고려시대]
후삼국의 쟁패과정에서 진도는 중요한 전략적인 의미를 가지며, 그 때문에 견훤과 왕건 간에 큰 싸움이 있었던 곳이었다. 왕건은 서남해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했던 후백제 편향의 강한 반발세력의 무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도서를 영속시키지 않고는 후백제의 견훤 세력을 장악하기 어려웠음을 스스로도 실토하고 있었다. 견훤의 해상 지원세력들은 바로 압해도와 진도 일대의 섬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별명이 수달로 널리 알려졌다는 압해도의 능창(能昌)은 왕건이 가장 두려워했던 견훤 편의 장수였고, 당시의 역사기록들은 다른 여러 섬의 세력들이 후백제를 도와 고려에 대항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왕건은 나주 공략에 앞서 호남 장악의 제1보로 진도와 고이도(현재의 신안군 압해면)를 연결하는 해로를 차단하면서 영산강 입구인 목포와 영암 덕진포를 거슬러 나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고군지역의 진도현은 고려 성립 이후 왕건 세력의 호남 기지인 나주목의 관할 하에 귀속되면서 진도군으로 다시 승격되었고, 군내·임회지역의 가흥·임회현을 영속현으로 거느리게 된다. 이러한 역사가 바구리 섬 전설에 나주가 등장하는 이유와 사연이라고 추측한다. 바구리 섬을 나주와 무안이 자기 것이라고 다투는 이야기의 핵심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의 진도 역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근거는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군내면 금골산 5층석탑(지방문화재 78호)이다. 비록 건립 시기는 고려시대이지만 금골산 5층석탑의 기본 양식이 백제 석탑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바로 군내지역의 이 같은 백제 혹은 후백제 편향의 의식적인 지역 분위기와 전통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백제 혹은 후백제의 견훤 편에 섰다가 패자가 되고 결국 그로 인해 왕건을 도왔던(사실은 고군지역이 왕건을 도왔다는 근거는 불분명하고 왕건 세력의 부식 결과로 볼 수도 있음) 고군지역의 영속현으로 존속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군내지역의 토착세력들이 고려 시기까지도 전 시기의 정치적 성향을 존속시키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진도 역사에서 몽고 침입과 삼별초는 빼놓을 수 없는 큰 사건이다. 삼별초(三別抄)는 1,000여 척의 선단에 가족과 공·사노비 재물을 싣고 강화를 출발, 1270년 8월에 진도 용장성에 웅거, 이듬해 5월 제주로 피해가기까지 전후 9개월 간 진도에 머물렀다. 당시 삼별초가 진도를 항전의 기지로 선택한 것은 대체로 몽고병이 꺼리는 해전을 할 수 있는 섬이면서도 진도가 남쪽 해안의 여러 섬들 중에서 크고 물산이 풍부하여 군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는 점, 명량해협을 끼고 있어 전략상 요충이자 여러 조건이 응전에 유리하였다는 점, 삼별초나 무신정권의 기반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 등이 손꼽혀지는데, 이는 진도 역사의 지리적 특성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최씨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진도에 있었음을 일러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진도 사람 김몽규(金夢奎)가 지은 『옥주지(沃州誌)』(1761)에 보이는 최충헌의 손자이자 최우의 아들이었던 최항이 진도 용장사에 머물면서 전횡을 하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용장사는 고려실록의 사고가 옮겨질 계획도 세워졌던 곳이며, 대규모 불경 간행도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는 무신정권과 진도와의 인연이 이미 오래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배중손이 진도의 임회(현재의 남도포가 있는 면) 출신이라는 구전이 있는 점도 주목된다. 어쨌든 진도에 웅거했던 삼별초는 현재의 진도군 고군면 용장리 일대에 궁성(용장성)을 건설하고 주위에 대규모의 산성(진도 용장성)을 건설하여 응전 태세를 갖추는 한편 그 세력을 확장하여 전라·경상의 해안과 남해·창선·거제 등의 30여 개 섬을 장악하고, 독자적으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 명실상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몽고에 대항하였다.
삼별초의 진도 점거와 진도지역에서의 강력한 저항이 끝나자 곧이어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였고 진도지역은 다시 그들의 침입로가 되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서남해안 지역이 폐허가 되자 고려 정부는 이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조창의 이설, 군현 치소의 이폐, 주민들의 이주 등 매우 소극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공도정책(空島政策)’은 바로 그러한 소극책의 대표적인 예였다. 이로써 바닷가의 섬과 해안지역 주민들은 내륙으로 그 터전을 옮겼는데, 진도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80여 년 간이나 영암(시종면)과 해남(삼산면) 땅에서 타향살이를 해야만 했던 것은 이 같은 과정의 산물이었다. 결국 왜구로 인한 혼란과 중앙정부의 행정적 공백이 도서를 황폐화 시켜버린 셈이었다.
[조선시대]
조선이 건국되고 조선의 국가기반이 공고해지면서 도서지역에 대한 연해 주민의 이주도 급속히 전개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도서 이주는 정부로부터 여러 종류의 규제를 받고 있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쇄환·추포의 명령이 내려질 정도로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당시의 도서 이주민은 이러한 제약과 한계를 뛰어 넘는 경우의 불법적 이주였던 셈이며, 그 수나 처지도 그렇게 양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5세기 중후반 계속되는 금지 조항의 내용과 성격을 미루어 볼 때, 주민들의 이주가 계속 진행되었다.『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나 『고려사(高麗史)』의 지리지와 비교하여 몇 배에 달하는 섬들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주의 결과를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민의 이주와 정착도 왜란의 와중에서 다시 한번 굴절되고 만다.
진도의 경우 ‘입도조(入島祖)’들은 많은 경우가 임진왜란 이후(17세기 전후)로 현주민으로부터 10~15대조 정도가 일반적이다. 현재의 섬 주민들이 최초 이주민으로 믿는 입도조는 바로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교체된 이주집단의 선착민이었던 셈이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섬 지방 이주민들은 대개 해운로를 사이에 둔 내륙 연안의 주민들이거나 해로(당시는 조운로)를 따라 유리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진도의 조선시대 문화 저변에는 인접한 서남해 연안의 ‘조선 전기 내륙 문화’ 계열이 섬이라고 하는 특수한 자연환경 때문에 내륙과는 구조적으로 차이를 보이면서 또 내륙보다는 비교적 그 전통을 온존시키면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근현대]
1945년의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환희와 함께 혼란과 고통도 아울러 가져다주었다. 진도지역은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온 도민이 환호작약하는 가운데, 일제에 충성을 다해 공출, 징발 등에 앞장서 온 면장이나 밀정 행위를 한 자 등을 징치(懲治)하는 등의 행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경이 되면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진도군 지부가 결성되자 곧바로 인민공화국수립이 선포되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바로 인민위원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진주한 미군사령부가 군정을 포고하면서 이를 불법단체로 간주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고, 주된 활동 인사들은 지하로 잠적하였다.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한국민주당 등의 진도군 지부 등이 속속 결성되면서 진도도 해방 후의 어느 공간이나 마찬가지로 좌·우익 간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해방 이후 정국의 숨 가쁜 격랑을 넘어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수립되어 가던 중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처참한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1950년 8월 31일에 전라남도 해남군의 우수영으로부터 약 1개 소대 병력의 북한군이 상륙하여 진도를 접수하였다. 이후 10월 5일 철수했던 경찰 병력이 다시 진군해 와 진도를 수복하였고 북한군 및 그의 협조 세력들은 많은 수가 섬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50여 일간 진도군내에서는 좌·우익 양 세력이 서로를 해치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유혈극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진도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 경제개발에의 참여, 교육 및 사회시설 등의 확충, 문화의 전승 및 육성 등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