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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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建-珍島占領 |
영어음역 | Wang Geonui Jindo Jeomnyeong |
영어의미역 | Occupation of Jindo by Wang G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병인 |
[정의]
909년 왕건이 후백제 땅이었던 진도를 점령한 사건.
[역사적 배경]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면서 진도를 비롯한 서남 해안 지역은 그 세력권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901년 견훤이 서남 해안 일대의 금성 지역 부락들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자 금성 지역의 토호(土豪)들은 궁예 정권에 내부(內附)하여 훤호를 요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903년 궁예는 왕건에게 금성 일대를 정복하도록 하였고, 개경 지역 해상 세력 출신인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금성을 공략하고 인근 10여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후 금성에 병력을 상주시켜 군사 거점화하고 지명도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목적]
왕건의 진도 점령은 불완전한 나주 점령을 완전하게 하여 후백제의 배후 지역에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고, 나아가 후백제가 중국과 소통할 수 있는 해상로를 봉쇄하려는 데 있었다.
[경과]
왕건은 나주 점령 6년 후인 909년 6월에 수군 2,500명을 이끌고 광주→진도군→ 고이도→나주 포구→덕진포로 진격하였다. 후백제의 견훤도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분전했으나 이듬해인 910년 덕진포 싸움에서 왕건이 승리함으로써 진도를 비롯한 서남 해안 일대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913년 궁예는 왕건의 공을 인정하여 파진찬으로 승진시키고 소환하였다. 914년 왕건은 전함을 수리한 후 군사 2,000명을 이끌고 다시 나주로 돌아와 해적 등을 소탕하였다. 915년에는 군사 3,000명과 군량을 싣고 와 기근에 허덕이는 병졸과 주민을 구제하였다.
[결과]
왕건의 진도 점령은 이 시기에 이미 진도가 서남 해안의 군사상의 요충지로서 그 가치가 크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왕건의 진도 점령으로 이 지역은 친왕건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 개국 후 견훤에게 밀리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진도를 비롯한 서남 해안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특히 936년 왕건이 후백제와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서남 해안 일대에서의 군사적 조력이 컸던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