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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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詩 |
영어음역 | Hansi |
영어의미역 | Chinese Poem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집필자 | 김대현 |
[정의]
한자문화권에서 한자(漢字)로 창작된 시.
[개설]
전라남도 진도군은 여러 전란을 겪었던 불운의 섬이기도 했으나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어 섬 자체가 문화유적지라고도 할 수 있다. 지리적 위치상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 조선시대까지 유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진도 사람들의 문집과 한시작품은 많지 않으나 진도에 유배를 왔던 사람들이 진도에서 남긴 한시가 많아 진도의 한문학을 풍성하게 채워주고 있다.
[시대별 한시 작품]
여기에서는 시대별로 진도의 한시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려시대]
현재 남아 있는 진도의 한시 중 최초의 작품은 조선시대 영조 때 사람인 김몽규(金夢奎)가 1716년에 지은『옥주지(沃州誌)』에 전한다.『옥주지』에는 한시 10편이 들어 있는데, 그 중 「누정(樓亭)」편에 실린 8편 중 세 편이 고려시대 인물의 작품으로 고조기(高兆基)[?~1157, 고려시대 문신]·채보문(蔡寶文)[고려시대 문신]·조희직(曺希直)[고려말기의 문신]의 작품이 그것이다. 모두 벽파정에서 읊은 것으로 그 중 고조기의 한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珍島江亭 진도강정에서
行盡林中路 숲 사이 길이 다하는 곳에
時回浦口船 이내 포구의 배를 탄다.
水環千里地 물은 천리 먼 땅을 두르고 있고,
山礙一涯天 산은 한쪽의 하늘을 막았다네.
白日孤槎客 대낮에 외로운 배를 탄 나그네는
靑雲上界仙 청운에 올랐던 신선이었지.
歸來多感物 돌아오니 경치에 느낌도 많아,
醉墨灑江烟 글을 써서 읊어서 강바람에 뿌린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에 진도에 와서 진도의 풍광을 노래한 작품 몇 편이 전한다. 김신윤(金莘尹)[고려후기 문신]·이원(李原)[1368~1429, 고려말기~조선전기의 문신]의 한시 한 편씩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누정」편에 실려 있고,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인 김극기(金克己)의 작품 한 편이 『중증진도읍지(重增珍島邑誌)』에 실려 있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언제 진도에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들이 모두 「누정」편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누정’이 외지인들이 찾아와서 시를 읊을 만큼 널리 알려진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 김극기의 한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曠野初尋路 넓은 들 처음으로 길을 찾아,
澄江忽上船 문득 맑은 강 위의 배에 오르네.
殘山屛匝地 나지막한 산은 병풍처럼 땅을 두르고,
碎浪雪漫天 부서지는 물결은 눈같이 하늘에 가득하네.
淨境逃塵俗 깨끗한 곳은 속세를 피하였고,
淸遊厭水仙 맑은 놀이는 수선보다 더하다네.
興闌紅日晩 흥이 한창인데 붉은 해가 저무니,
孤島起炊烟 외로운 섬엔 저녁연기 피어오르네.
이렇듯 고려시대 진도에서 지어진 한시들은 모두 외지인들의 작품이고, 또한 ‘누정’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중 조희직은 진도에 유배를 왔다가 정착하게 된 사람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잠깐 들렀던 사람들로 보인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조금 더 다양한 한시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집을 발간한다거나 많은 양의 한시작품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가 되어서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최초의 진도 유배자는 위충(魏种)이라 할 수 있다. 위충은 1392년(태조 1년)에 진도에 유배되었는데, 그의 시 한 편이 전한다.
漫遊珍島靑猫山詩吟(만유진도청묘산시음, 진도 청묘산에서 노닐며 시를 읊다)
松山王氣已成來(송산왕기이성래, 송도의 왕씨 기운 이미 이루어졌으니)
新主龍興泰運開(신주용흥태운개, 새 주인 일어나 큰 운수 열렸구나)
常念舊君全一節(상념구군전일절, 옛 임금 그리는 한결 같은 이내 충절)
飄然歸臥子陵臺(표연귀와자릉대, 바람 따라 돌아와 자릉대에 누워 있네)
조선시대 진도의 한시작품은 앞서 언급했던 『옥주지(沃州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적(古蹟)」편에 이주(李冑)[조선중기 문신]의 한시 한 편이 전하며, 「누정」편에는 신규(申奎)[조선후기 문신]·이경의(李景義)[1599~1640, 조선중기 문신]·김진상(金鎭商)[1684~1755, 조선후기 문신]의 한시가 각각 한 편씩 실려 있다. 또한 「제영(題咏)」편에 경차관 홍적(洪迪)[1549~1591, 조선중기 문신]의 한시가 한 편 전한다. 이 중 이주의 작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天開寶剎兩三間(천개보찰양삼간, 하늘이 열어 놓은 두세 칸 보찰에서)
白業胡僧門不關(백업호승문불관, 불도를 닦던 중국 승려가 문을 닫지 않는구나)
石塔百層半空入(석탑백층반공입, 석탑은 백층이나 반공에 솟아 있고)
鐵庭萬丈千古頑(철정만장천고완, 만장이나 우뚝 솟은 바위 천년 동안 변함없네)
寒潮曉落出塩井(한조효락출염정, 차가운 조수가 새벽이면 물러가니 염정으로 나가는데)
黑霧朝消多海山(흑무조소다해산, 어둔 안개 아침 되어 사라지니 바다에는 산도 많아)
遊目天涯雲更遠(유목천애운경원, 하늘 끝까지 바라보니 구름은 더욱 멀어)
北書不至吾得還(북서불지오득환, 서울 편지 오지 않으니 내가 돌아갈 수 있을까)
『옥주지』에는 고려시대의 한시 세 편과 조선시대의 한시 다섯 편이 들어 있다. 그리고 「누정」편에 원치도(元致道)와 신백주(申伯周)라는 인물의 한시가 한 편씩 전하나 그들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 중 이주는 특별히 다른 이들보다 더 진도와 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몇 편 전해지지 않은 고려시대 진도의 한시 중 이원이 벽파정을 노래한 시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하는데, 이원은 바로 이주의 증조부이다.
이러한 한시작품들도 모두 외지인들이 진도에 유배왔거나 진도를 유람하면서 쓴 것으로 진도의 아름다운 풍광이나 자신의 서글픈 감정을 술회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외지인이 쓴 한시는 1791년부터 1794년까지에 걸쳐 간행된 『진도군읍지』에도 실려 있다.
『진도군읍지』에는 송인수(宋麟壽)[1487~1547, 조선중기 문신]·유근(柳根)[1549~1627, 조선중기 문신]·이민구(李敏求)[1589~1670, 조선중기 문신]·유득일(兪得一)[1650~1712, 조선후기 문신] 등의 한시 작품이 각각 한 편씩 전한다.
진도 유배자로서 여러 편의 한시를 남겨, 진도 한시의 양을 풍부하게 한 인물로는 노수신(盧守愼)[1515~1590, 조선중기]을 들 수 있다. 노수신은 19년간이나 진도에 유배됐던 인물로, 이전의 사람들이 각각 한 편씩의 한시를 남긴 데 비해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또 진도로 유배되어 올 때에 본 모습과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오언고시 400구 총 2,000언으로 쓴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 외지인이 쓴 한시작품뿐만 아니라 진도사람들이 쓴 작품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허유(許維)[1809~1892, 조선후기 문인·서화가]이다. 그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정착하여 살았던 인물로, 친필 시집 『운림잡저(雲林雜著)』를 남겼다.
『운림잡저』는 1988년 진도문화원에서 발굴하여 국역으로 발간하였는데, 진도 최초의 한시집이라 할 수 있다. 운림산방에서 사는 허유의 마음이 나타난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無題(무제)
謝却人間事(사각인간사, 인간사를 떠나)
山中結數椽(산중결수연, 산중에 두어칸집 지었네)
有能同志者(유능동지자, 뜻을 같이하는 사람 있다면)
來共白雲眠(래공백운면, 찾아와 흰구름과 잠들었으면)
이외에도 박근손(朴根孫)[조선시대 무신]·김름(金凜)[조선중기 무신 등 진도사람들의 한시작품이 전해지긴 하지만, 역시 각각 한 편씩만 전해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허유 이후 시집을 남긴 인물들이 나타나 진도의 한시가 풍성하게 된다.
[근현대]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진도에도 한시 관련 문집들이 여러 권 간행되어 이전보다 매우 많은 양의 한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문집으로 1896년부터 1907년까지 진도에 유배되었던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의 『은파유필(恩波濡筆)』을 들 수 있다. 『은파유필(恩波濡筆)』은 진도 유배생활에서 보고 듣고 생활했던 것을 시로 쓴 작품집으로 당시 진도의 모습과 풍속, 저자의 마음 등을 엿볼 수 있다.
『은파유필(恩波濡筆)』은 1988년 진도문화원에서 국역으로 발간하였는데, 모두 157수의 시가 실려 있어 양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그 중 한 편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端午(단오)
家家楊柳彩繩飛(가가양류채승비, 집집마다 버들가지 푸른 노끈처럼 날리고)
隊隊菖蒲寶髻輝(대대창포보계휘, 늘어선 창포에는 상투가 빛나도다)
映街紫奈朱櫻實(영가자내주앵실, 붉은 능금 붉은 앵두는 거리마다 덮여 있고)
烘日香羅細葛衣(홍일향라세갈의, 비단옷 갈포 옷을 햇빛에 말린다네)
此鄕不識繁華好(차향불식번화호, 이 고을사람들 사치할 줄 모르기에)
遠客飜疑節序違(원객번의절서위, 먼데서 온 나그네는 절서가 잘못되었나 의심하였네)
出色石榴花一樹(출색석류화일수, 곱게 활짝 핀 한 그루 석류꽃은)
短墻西甬對斜暉(단장서용대사휘, 낮은 담 서쪽에서 저녁노을 대한다네)
20세기에는 진도 출신 문인들의 시집 세 권이 발간된다. 혜사(蕙史) 박진원(朴晋遠)의 『혜사시집(蕙史詩集)』·죽사(竹史) 이기호(李基昊)의 『죽사유고(竹史遺稿)』·소산(素山) 이남원(李南元)의 『소산시집(素山詩集)』이 그것이다.
혜사 박진원[1860~1932]은 진도읍에서 태어나서 자란 인물로 『중증진도읍지』를 저술하였고, 무정 정만조와도 깊은 교유를 가졌다. 그의 『혜사시집』에는 1888년부터 1896년까지 젊은 시절에 썼던 시 135편이 실려 있는데, 1992년 진도문화원에서 국역으로 발간하였다.
죽사 이기호[1899~1983]는 진도군 임회면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로, 그의 유고를 1997년 자제들이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294편의 한시 중 「수연송(壽宴頌)」을 제외한 188편이 그의 작품들이다. 진도군 의신면 출신의 소산 이남원[1904~1988]이 지은 『소산시집』에는 한시 28편이 실려 있다.
이렇듯 고려시대부터 단편적으로 존재해왔던 진도의 한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왕성하게 창작되고 있다. 이는 호남지방의 한문학이 20세기에 들어서 어느 시기보다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