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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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路 |
영어의미역 | sea route / sea way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에 있는 바닷길.
[개설]
바다에는 해류와 조류가 있다. 해류는 바다 속에 있는 강을 따라 따뜻한 곳에서 찬 곳을 향해 흐르는 흑조라는 물줄기이다. 조류는 바람과 달의 인력과 다른 천체들의 끌어당기는 인력에 의해 움직이는 물줄기이다.
조류는 육지에 가까울수록 연안수인 강물의 영향을 받아 심해 무조점이라 이르는 극점을 향해 하루 두 차례 물이 쏠렸다가 원위치 가까이 돌아가는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 밀물과 썰물의 흐름은 물길 중간에 있는 섬과 육지의 생김새와 갯벌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해류, 조류, 돛에 영향을 주는 바람의 성질을 파악하여 그들이 드나드는 길을 정하였다. 이것이 고대의 해로이다. 섬과 대안에는 배를 대기에 적합한 포구가 정해졌다.
먼 바다를 항해할 때는 물과 바람을 따라 배를 부리지만 위기가 닥칠 때는 피신하기에 적합한 육지나 섬이 보이는 해로를 이용하였다. 이 시기의 항법을 표류항법 또는 시계항법이라 한다.
방위를 알려주는 나침판이 개발되고 어느 정도 자연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배의 규모와 성능이 향상되면서 먼 거리의 항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고대]
진도는 서남해안의 중간에 자리 잡은 섬으로 예부터 중국으로 가는 해로의 중심에 있었다. 846년 진도 해역을 지나간 일본의 엔닌[圓仁]이 쓴 『구당구법순례행기』 중 일본으로 귀국하는 항로상에 진도 섬의 명칭이 나온다. 왕건은 나주를 공략하기 전 남해안의 관문이라 할 진도를 먼저 차지했고 삼별초군 또한 진도에 주둔하여 남해안을 장악했다.
[조선시대]
최영 장군이 제주의 목호난을 평정할 때도 진도 벽파항에 모든 선박을 모이도록 했고 이순신 장군도 벽파진에 17일간 머물면서 명량대첩을 구상하였다. 진도 벽파진의 성황당에는 외국 무역선들이 제사를 지낸 유물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 같은 해로상의 중요성 때문에 통행선의 점검권을 준 수군 만호진을 두 곳에 두었다. 진도 해역에는 외양선이나 왜구의 침입을 알리는 2개의 직봉 봉수와 3개 연대, 8개의 돈대를 두기도 했다. 진도는 주요 바닷길의 길목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외국선이 표류하는 경우가 잦았다.
[일제강점기]
구한말 일본의 발동선이 연해안에 정박하면서 진도와 해남 사이에 위치한 명량해협은 남해안 제일의 항로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목포~부산간, 목포~제주간, 목포~일본간 모든 선박은 명량해협을 이용했다. 장흥~완도간 여객선이나 화물선도 모두 명량해협을 이용했다.
[현대]
목포~제주간 선박이 고속화되면서 일부 여객선이 조도~진도간 물목을 이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추자도를 거치는 제주~목포간 여객선은 명량해협을 지나고 벽파항을 경유한다. 1980년대까지도 신안군의 가거도나 만재도는 진도를 왕래 대안으로 이용했다.
해양수산부는 뒤늦게 진도의 해로상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1985년 임회면 서망항을 국가어항으로 지정하였으며, 1998년 진도 남부의 임회면 팽목항을 연안항으로 지정하고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시설]
진도는 수많은 선박의 해로로 이용되기 때문에 1907년 조도면 맹골군도의 죽도에 죽도등대를 세웠다. 1909년에는 조도면 하조도에 하조도등대를 세웠다. 1913년에는 울돌목의 녹진에 녹진등대를 세웠다. 1915년에는 조도면 가사도에 가사도등대를 세웠으며 그 외에 수많은 항로표지 무인등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