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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708
한자 許百鍊
영어음역 Heo Baekryeon
이칭/별칭 의재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남종화가
출신지 전라남도 진도군
성별
생년 1896년연표보기
몰년 1977년연표보기
본관 양천(陽川)
의재(毅齋)
대표경력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
상훈 1962년 문화훈장 문화포장|1966년 예술원상[미술부문]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태어난 남종화의 대가.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호는 의재(毅齋)허련(許鍊)의 방계(傍系)로 태어났다. 8세 때 한학을 배웠으며 허련의 넷째 아들 허형(許瀅)에게서 묵화의 기본화법을 익혔다.

서울 출신인 무정(茂亭) 정만조허백련에게 한학(漢學)을 가르친 스승이며 그에게 의재란 호를 지어 주었다. 무정은 39세 때인 1896년 무고(誣告)로 진도에 유배되어 사면되기까지 12년간 머물렀다. 호남 화단의 남화에 있어 의재가 점한 위치를 고려할 때 스승 무정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학력]

1908년 공립 진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인 교장의 구타에 항의, 자퇴했다. 1911년 귀양에서 풀린 정만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서화미술원에서 장승업의 제자 조석진(趙錫晋)[1852~1920]을 만나게 된다.

일본에 건너가 국립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 법학과에 다녔으나 곧 중퇴하고 일본 남종화(南宗畵)의 대가인 고무로[小室翠雲] 문하에 있었다.

[경력]

귀국 후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20년 목포 공회당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추경산수」가 1등 없는 2등으로 입상했고, 6회까지 선전에 출품했다.

8·15해방 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부터 추천작가·초대작가가 되었다. 196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활동사항]

전국을 유람하며 자연체험을 하고 1938년 광주에서 서화가들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했다. 1939년에는 광주 무등산 증심사 아래에 연진미술원을 개원하여 후학양성과 문인화의 중흥에 힘썼다.

1971년 서울신문사 추최 ‘동양화 6대가전’을, 1973년 동아일보사에서 대규모 ‘초대회고전’이 열렸다. 제자로는 연진회 그룹과 구철우, 김옥진, 조방원, 신영복, 곽남배, 박행보, 이창주, 양계남 등이 있다.

[작품]

현재 전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1954년 64세에 그린 「일출이작(日出而作)」은 「농경도(農耕圖)」로 지칭되기도 한다. 또한 주제에서 전통과 현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그림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일종의 토속미(土俗美)가 보이며 해남 녹우당에 비장된 윤두서의 「경작도」와 동일한 주제인데 1947년 농림기술학교를 세워 농업교육을 통한 농촌부흥운동에 앞장 선 의재의 또 다른 면모를 떠오르게 한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설경(雪景)」(1965), 「추경산수(秋景山水)」(1971)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문화훈장 문화포장, 1966년 예술원상(미술부문)을 수상했다.

[의의와 평가]

허백련은 한국화단에서 남종화의 맥을 이은 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단아하고 깊이 있는 운필(運筆)을 통하여 남종화의 정신세계를 가장 진솔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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