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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처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831
한자 申處洙
영어음역 Sin Cheos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아버지 신양(申瀁)
생년 1690년연표보기
몰년 1742년연표보기
여인(汝仁)
대표관직 진도군수|사간(司諫)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여인(汝仁).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신양(申瀁), 할아버지는 신응징(申應澄)이다. 처는 용인인 이태악(李泰岳)의 딸이다.

[활동사항]

1711년(숙종 37)에 진사(進士)에, 1721년(경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정언, 사서(司書), 1726년(영조 2)에 지평(持平), 장령(掌令), 1727년(영조 3)에 필선(弼善), 정언(正言), 보덕(輔德), 사간(司諫)을 지냈으나 1727년(영조 3)에 상소와 관련해 사간직에서 파면되었다.

이후 서용되어 1729년(영조 5)에 필선(弼善), 장령(掌令)을 지냈으나 삼전도 비문을 쓴 오준과 관련한 간언으로 갑산부(甲山府)로 귀양을 갔고, 이어 유배지 가옥 둘레를 가시나무로 둘러싸게 하는 추가형을 받았다.

3년 후인 1732년 위리(圍籬)를 철거하고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3년 후인 1735년에 삭탈의 죄를 용서받고 직첩을 돌려받았다.

1741년(영조 17)에 다시 필선, 사간을 지내다가 임금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1741년(영조 17) 11월 진도군수로 좌천되었다. 1742년(영조 18) 1월 10일 영의정인 김재로(金在魯)가 늙은 어미가 있기 때문에 외보(外補: 지방에 보임함)를 풀어줄 것을 청하여 다시 복귀하였으나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1772년(영조 48)에 추탈되었다.

[저술]

조선후기 왕의 책문(策問)에 대해 응시유생(應試儒生) 또는 조정신료(朝庭臣僚)들이 답한 것을 모아둔 책인『동책(東策)』에 신축증방광(辛丑增榜廣) 때의 신처수의 책문 1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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