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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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瓊 |
영어음역 | Yang G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정호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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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양한서(梁漢瑞) |
아내 | 박강생(朴剛生)의 딸 |
출신지 | 전라남도 영광군 |
성별 | 남 |
생년 | 1394년 |
몰년 | 1454년 |
본관 | 제주 |
자 | 여숙(麗淑) |
호 | 사양재(思養齋) |
대표관직 | 구례현감|해진군사|진도군수 |
주요활동/연도 | 1437년 6월 29일 진도 군수로 부임함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제주. 자는 여숙(麗淑), 호(號)는 사양재(思養齋). 할아버지는 집현전 대제학 양동재(梁棟材)[혹은 碩材]이고, 아버지는 경상 병마절도사 양한서(梁漢瑞)이다. 부인은 대제학 박강생(朴剛生)의 딸이다. 아들 양정명(梁井明)이 있다. 양성지가 그의 후손이다.
[생애]
1394년(태조 3) 2월 9일에 태어났다. 구례현감, 해진군사, 진도군수 등을 역임하고 1454년(단종 2)에 향년 61세로 타계하였다.
[활동사항]
현신들의 천거로 1434년(세종 16)에 발탁되어 구례현감에 제수되었다. 1437년(세종 19)에 해남과 진도가 합쳐 있던 해진군(海珍郡)의 해진군사(海珍郡事)로 임명하였다. 당시 진도에는 군이 설치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왜구의 침탈이 심해지자 양경이 장계를 올려 별도의 군 설치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 진도군(珍島郡)을 설치하기로 하고, 같은 해 6월에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부임 당시에는 진도군의 구읍(舊邑)이었던 외이리(지금의 고성)에 임시 치소를 두었다가 현재의 진도읍 자리에 새로운 치소를 짓기 위해 읍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먼저 관아(官衙)와 이에 따르는 건물들을 건설하고 성책을 축조하였다.
다음해 8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영광으로 돌아갔다. 진도 군민들은 그를 아쉬워하며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양경은 3년간 시묘를 살면서 묘소 아래에 작은 집을 짓고 이를 사양(思養)이라 이름지었다. 시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445년(세종 27) 가을에 진도군에 토적의 소요가 일어나자 지진도군사(知珍島郡事)로 임명되어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외에도 양경은 진도의 학문 발전과 교육 진흥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진도군수 재직시에 진도 군민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사재로 학교를 짓고 양사재(養士齋)를 세워 고을의 젊은 수재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이 젊은 인재들을 조정에 천거하여 각기 직첩을 받게 하였다.
[묘소]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생곡리(생실)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