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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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台重 |
영어음역 | Yi Taej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삼(子三), 호는 삼산(三山).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이정기(李廷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행(李荇)이고, 아버지는 참봉 이병철(李秉哲)이다. 어머니는 박태상(朴泰尙)의 딸이고, 아내는 안동(安東) 권감(權瑊)의 딸이다. 아들로는 이득영(李得永), 형제로는 형 이화중(李華重)과 동생 이기중(李箕重), 이형중(李衡重), 이상중(李商重)이 있다.
[생애]
1694년(숙종 20)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지평, 황해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예조참판, 부제학, 호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영조 32)에 52세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이희조(李喜朝)의 문인으로 1717년(숙종 4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30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5년(영조 6) 지평이 되어, 신임사화 때 화를 입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주장하다가 분당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탄핵 이후 흑산도에 ‘길을 갑절이나 빨리하여’ 위리안치되었고, 이듬해에 영암으로 이배되었다.
1740년에 풀려난 뒤 양사·세자시강원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740년에 다시 지평이 되어 좌의정 유봉휘(柳鳳輝),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의 관작을 추탈할 것과 당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자신의 아버지의 묘를 ‘왕(王)’자 산맥(山脈)에 쓰고 나서 지사(地師)에게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죄를 들어 파직시킬 것을 주청하다가 도리어 갑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대신들의 주청으로 풀려나와 부교리·황해도 관찰사·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1747년(영조 23년) 5월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명하고 여러 차례 재촉하였지만 끝내 이를 받들지 않자 의주에 정배(定配)하였으나 곧 병이 위중하다 하여 방면하였다.
1748년(영조 24) 11월 동래부사가 되었다가 1750년(영조 26) 1월 다시 전라도 관찰사를 명했으나 오래도록 명에 따르지 않자 가두어 두었다가 사면하였다. 그러자 그 날로 사조(辭朝: 조정을 떠남)하였고, 여러 차례 부임하라 명하였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자 진도군수로 좌천시켰다.
1750년(영조 26) 9월 병조참의가 되었고 승지, 평안감사, 예조참판·부제학·호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
저서로는『삼산집』이 있다.
[상훈과 추모]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진도 봉암사(鳳巖祠)에게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