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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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川廣域市彌鄒忽區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현숙 |
홈페이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http://michu.incheon.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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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8년 1월 1일 - 인천광역시 남구 경기도 인천시 남구로 개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0년 1월 1일 - 인천광역시 남구 경기도 인천시 남구 4개동을 분동하여 28동이 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1년 7월 1일 -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 남구에서 인천직할시 남구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8년 1월 1일 - 인천직할시 남동구 신설 27동이 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5년 1월 1일 - 인천직할시의 광역시로 승격에 따라 인천직할시 남구에서 인천광역시 남구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5년 3월 1일 - 인천광역시 남구 인천광역시 연수구 신설로 23동이 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3월 1일 - 문학동이 문학동과 관교동으로 분동됨에 따라 24동이 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9년 2월 1일 - 인천광역시 남구 일부 동 통합함에 따라 21동이 됨 |
변천 시기/일시 | 2018년 7월 1일 - 인천광역시 남구에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로 개편 |
행정 기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독정이길 95[숭의동 131-1] |
문화재 | 인천도호부 관아 터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근대 문화유산 | 대한민국 수준 원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인하 공업 전문 대학 구내 |
[정의]
인천광역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
[개설]
구(區)는 서울특별시, 5대 광역시 및 인구 50만 명 이상의 대도시에 설치되는 하부 행정 구역으로, 국가가 위임한 사무를 처리하는 보통 행정 구역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도화동(道禾洞), 숭의동(崇義洞), 용현동(龍現洞), 학익동(鶴翼洞), 주안동(朱安洞), 관교동(官校洞), 문학동(文鶴洞)의 7개 법정동이 있고, 산하에 숭의 1·3동, 숭의 2동, 숭의 4동, 용현 1·4동, 용현 2동, 용현 3동, 용현 5동, 학익 1동, 학익 2동, 도화 1동, 도화 2·3동, 주안 1동, 주안 2동, 주안 3동, 주안 4동, 주안 5동, 주안 6동, 주안 7동, 주안 8동, 관교동, 문학동 등 21개 행정동이 있다.
[자연환경]
동쪽으로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쪽으로는 인천광역시 중구와 인천광역시 동구, 남쪽으로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북쪽으로는 인천광역시 서구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 24'~126° 42', 북위 37° 29'~37° 38'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동서 6.2㎞, 남북 5.9㎞이다. 동쪽 끝은 주안동으로 동경 126° 24' 29", 서쪽 끝은 용현동으로 동경 126° 23' 53", 남쪽 끝은 문학동으로 북위 37° 25' 53"이고 북쪽 끝은 도화동으로 북위 37° 28' 56"이다.
총면적은 24.85㎢로 인천광역시 전체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중앙부는 주로 상업지와 주택지로 개발되었으며, 용현동과 학익동 등 서부 해안 인접 지역에는 전자·화학·유리 등의 공업 지역, 북부의 도화동과 주안동 일대에는 목재 및 가구 제조·전자 기계·화학·유리 등의 공업 지역이 조성되어 있다. 총면적 중에서 대지와 도로가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신시가지 개발과 급격한 인구의 증가 등으로 행정 수요의 급증은 물론 구 전체가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남쪽으로 인천광역시 연수구와 경계를 이루는 문학산의 줄기가 동서로 뻗어 뚜렷한 산줄기를 형성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탄한 구릉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17.12m의 문학산이고, 중심에 수봉산(壽峰山)이 있다. 용현 5동과 학익 1동 방향은 황해와 인접한 해안 지역이다.
주안동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흐르는 승기천 일대는 하천과 조류에 의해 퇴적된 평야 지역이었는데, 현재는 물길이 직선화되었고 주변 토지는 공업 용지와 상업 용지로 바뀌고 있다. 현재의 경인 고속 국도 가좌 인터체인지에서 휘어 들어와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까지 이르렀던 갯골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데, 이 일대의 간석지는 간척에 의해 염전과 농경지로 활용되다가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 계획과 더불어 공업 단지로 바뀌었다.
인천광역시 중구·동구·미추홀구·연수구 일대, 즉 월미도(月尾島)에서 자유 공원, 구 선인 학원, 수봉산 등의 동서로 이어지는 구릉지와 문학산, 청량산 등의 남북으로 연속되는 구릉지 및 산지에는 중생대 쥐라기에 꿰뚫고 들어온 흑운모 화강암이 넓게 분포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일본 열도의 고온 다습한 해양성 기후와 중국 한량 건조한 대륙성 기후의 중간 위치에 있는 반도성 기후를 형성하고 있다.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기상 변동이 심하고 강한 계절풍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과 내륙에 위치한 지역은 기후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연평균 기온은 12℃ 내외이고, 평균 강수량은 1,200㎜ 가량이다. 계절에 따라 추위와 더위의 차가 심한 편이다. 여름은 고온 다습하고 겨울은 한랭 건조하다. 연간 강수량의 70%가 여름을 중심으로 내리고 겨울은 강수량이 매우 적은 편이다.
[인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인구는 2018년 8월 31일 현재 18만 3634가구, 41만 8212명으로 가구당 평균 세대원 수는 2.277명이다. 이 중에서 남자는 21만 847명이고, 여자는 20만 7365명으로 남자가 3,482명 더 많다.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될 때에는 52만 7248명이었으나, 1988년 1월 인천직할시 남동구가 신설됨에 따라 남구의 일부가 인천직할시 남동구로 편입되어 45만 1445명이 되었다. 1995년 3월 1일에는 인천광역시 연수구가 신설되면서, 인천광역시 남구의 일부 지역이 인천광역시 연수구로 편입되어 43만 723명이 되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의 기록에서 인구 추이를 살펴보면, 2000년 42만 2952명에서 2009년에는 42만 6449명으로 3,497명이 증가하였다. 가구 수는 2000년 13만 9631가구에서 2009년에는 16만 9510가구로 2만 9879가구가 증가하였다. 이렇듯 가구 수는 꾸준히 증가하나 인구는 줄어들어서 인구가 가장 많은 해인 2003년 43만 6312명이었다가 이후로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역사]
인천광역시는 선사 시대부터 이미 사람이 살았던 지역이었다. 그것은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으로 입증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의 옛 인천 소년 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 있던 고인돌로 1927년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당시 이곳에서 발굴된 고인돌은 넓은 탁자 모양으로 그 안에서 토기 조각과 돌 화살 촉, 돌 칼, 숫돌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인돌은 이곳 이외에도 주안동 신기촌 일대와 도화동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미 선사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지역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의 비류에 관한 기사에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본기에서 백제가 성립하는 과정에 나오는 비류왕(沸流王)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비류왕의 아버지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고 동생은 백제를 세운 온조왕(溫祚王)이다. 비류는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할 곳을 찾다가, 미추홀(彌趨忽)로 와서 나라를 세웠는데, 이때가 기원전 18년이라고 한다. 미추홀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대체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현재 문학산에 남아 있는 문학산성[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호]이 비류가 처음 인천에 자리를 잡고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고, 미추홀 고성 또는 남산 고성이라고도 불린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문학산이 곧 미추왕의 고도(古都).”라는 표현이 나오며,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속전하는 바로는 문학산 위에 비류성 터가 있고 성안에 비류 우물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비류 백제는 건국 10여 년 만에 망하고 그 백성들은 온조가 세운 백제로 귀속된다.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이던 시기에 매소홀현이 설치되었다. 이후 신라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소성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시대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고, 다만 인천광역시 전체의 역사 속에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신라 후기 고려 전기를 지나면서 호족이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 인천광역시 지역에서는 인주 이씨(仁州李氏)가 대표적인 호족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인주 이씨는 그 시조가 통일 신라 경덕왕 때 아찬 벼슬에 있던 이허기(李許奇)라 전한다. 인주 이씨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주 이씨의 혈통과 집안 역사에 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인 『인천 이씨 세보(仁川李氏世譜)』에 이허겸의 손자 이성간(李成幹)의 부인은 개성 왕씨로 그 아버지가 왕건이라 되어 있다. 이는 인주 이씨가 고려 전기부터 왕실과 혼인을 할 정도로 강력한 호족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인주 이씨는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8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왕실과 거듭되는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지위를 굳히고, 다른 호족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인천 지역이 거대 호족이 되었다.
소성현은 1095년(숙종 원년)에 경원군(慶源郡)으로, 1133년(인종 11)에는 인주(仁州)로, 1390년(공양왕 2)에는 경원부로 개칭되었다. 지역의 이름이 바뀌는 것에서 고려 후기에 들어서 왕가(王家)와 계속 인연을 맺어 지금의 인천광역시가 ‘칠대 어향(七代御鄕)[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 왕실과 관련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라 불리도록 한 인주 이씨 집안의 영화(榮華)를 알 수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인천광역시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조선 시대부터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 인주(仁州)로 불렸던 인천은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태종이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군이나 현에 ‘주(州)’ 자가 들어 있는 고을은 ‘주’ 자 대신 ‘산(山)’ 자나 ‘천(川)’ 자로 고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금의 ‘인천’이라는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군의 소재지는 지금의 관교동에 있었다.
1460년(세조 6)에는 인천군이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인천군이 세조의 어머니이며 세종의 비인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진외가(陳外家), 즉 아버지의 외가 지역이기 때문이다. 소헌 왕후는 청송 심씨로, 아버지의 외가가 지금의 관교동 일대에 살았던 인천 문씨(仁川門氏) 집안으로 전해온다. 인천도호부의 관아가 있던 곳이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343-2 문학 초등학교 자리이다. 『인천부 읍지(仁川府邑誌)』에 의하면 객사(客舍) 30칸, 동헌(東軒) 10칸, 내동헌(內東軒) 33칸, 사령청(使令廳) 9칸, 군관청(軍官廳) 7칸, 옥사(獄舍) 4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천도호부 관아를 중심으로 향교와 서원까지 있었던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및 학익동 일대는 조선 시대에 행정과 사법, 군사, 종교 등 모든 분야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1688년(숙종 14)에는 인천도호부가 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과 관련이 있거나 공신의 출생지와 같은 경우에는 읍호(邑號)를 승격시키고 적군에 투항한 고을이나 역적, 패륜아 등의 출신지에 대하여는 읍호가 강등시켰는데, 1688년에 승려 여환(呂還) 등이 모반을 꾀하였다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고가 있을 때에도 10년이 지난 후에는 읍호를 원 상태로 복구시키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1698년(숙종 24)에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1812년(순조 12)에는 진채(振采)의 역모 사건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개항장인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지역에 개항장과 개시장의 행정 및 통상(通商) 사무를 맡아 보던 관아인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여, 부(府) 관아의 소재지가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서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으로 옮겨진다. 1895년(고종 32)에는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감리서가 폐지되고 인천부가 설치되었고, 다음해에는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1903년에는 개항장 일대만을 관할하는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이 새로 설치되면서 인천광역시의 중심지가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인천광역시 중구로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1914년에는 경기도 인천부의 대부분과 경기도 부평군 전부, 경기도 남양군 일부, 경기도 강화군 도서 일부를 통합한 경기도 부천군이 신설되었다. 인천광역시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경기도 부천군에 편입된다. 이때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일대는 대부분 경기도 부천군 문학면(文鶴面)과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多朱面) 일대에 속하게 된다. 경기도 부천군 문학면은 경기도 인천부 구읍면(舊邑面)과 서면(西面)이 합쳐져 생겨난 것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문학동, 학익동 지역이 경기도 부천군 문학면의 일부이다. 또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은 경기도 부천군 다소면(多所面)과 주안면(朱雁面)이 합쳐지면서 그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생겨난 것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과 도화동, 용현동, 숭의동이 속해 있었다.
1936년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지역이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에서 경기도 인천부로 편입되어 경기도 인천부 대화정이 되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이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사충리와 간석리 일부를 편입하여 경기도 인천부 주안정이 되는 등 부역(府域)이 확장되었다. 1940년에는 경기도 부천군 관할의 문학면, 남동면 등 4개 면이 경기도 인천부로 편입되었다. 1943년에는 경기도 인천부 문학 출장소가 설치되어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등 5개 동을 관할 내에 두게 되었다.
1947년 4월에 미 군정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1동 등 9개 동을 관할하는 경기도 인천부 주안 지청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1948년 경기도 인천부 남동 출장소, 문학 출장소, 주안 출장소 등 3개 출장소가 공식 출발하여 오늘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기틀이 된다. 1949년에 지방 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경기도 인천부가 경기도 인천시로 개칭된다.
1955년 8월 1일에는 인천시 조례 제128호에 의거하여 경기도 인천시 문학 출장소와 주안 출장소를 폐지하고 관할 동은 시의 직할 동이 되었다. 폐지되었던 경기도 인천시 문학 출장소와 경기도 인천시 주안 출장소는 다음해 10월에 부활된다. 1956년 11월에는 경기도 인천시 남부 출장소, 출장소, 문학 출장소, 주안 출장소 등 4개 출장소로 나누어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의 행정을 수행하였다(조례 144호).
시세(市勢)가 팽창함에 따라 1967년 3월에는 법률 제1919호로 「인천시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고, 1968년 1월에는 경기도 인천시 남구가 개청되었다. 경기도 인천시 남부 출장소, 남동 출장소, 문학 출장소, 주안 출장소 등 4개의 출장소를 통합하여 경기도 인천시 남구가 되었으며, 24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경기도 인천시 남구는 1970년 1월에는 인천시의 시세 확장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면서 4개 동이 나누어져 모두 28개의 행정동을 관할하게 된다.
1981년 7월 경기도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 남구가 인천직할시 남구로 개칭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1988년 1월에는 대통령령 제12367호에 따라 인천직할시 남동구가 신설되었는데, 이때 승기천 동쪽의 13개 동이 남동구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인천직할시가 인천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인천직할시 남구가 인천광역시 남구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3월 법률 제4802에 의거하여 인천광역시 연수구가 신설되면서, 문학산 남쪽의 8개 동이 분리되어 연수구 관할이 되었다. 다음해 3월에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과 문학동이 나누어져 인천광역시 남구는 모두 24개의 행정동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는 1992년의 관교 지구 택지 개발 사업으로 인한 대단위 아파트 신축으로 인구가 집중됨으로 인해 나타난 일이다.
2009년 2월에는 숭의 1동과 숭의 3동이 숭의 1·3동으로, 용현 1동과 용현 4동이 용현 1·4동으로, 도화 2동과 도화 3동이 도화 2·3동으로 통합되어 21개 행정동이 되었다. 2018년 7월 1일 「인천광역시 남구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에 의거, 남구 명칭이 미추홀구로 변경됨에 따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되었다.
[문화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광역시 역사의 발상지로 문학산성과 인천도호부 관아, 인천 향교, 수준 원점, 은율 탈춤, 서해안 풍어제 등 유형·무형의 문화재가 있다.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문학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학익동 고인돌 2기와 주안동 고인돌, 문학동 고인돌이 파악되고 있다. 학익동 고인돌[학익지석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4호]은 인천광역시 학익동 옛 인천 소년 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 있던 것으로, 1927년에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의해서 발굴 조사 되었다. 탁자 모양으로 내부에서 토기 조각, 돌 화살촉, 돌칼, 숫돌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71년 교도소의 확장으로 인해 인천광역시립 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주안동 고인돌과 문학동 고인돌 각각 인천광역시 주안동 ‘사미’의 ‘너분 바위’와 문학산 줄기의 도처현 고개 남쪽 밭 가운데에 있던 것이다. 1979년대 택지 개발에 따른 시가지 확장으로 수봉 공원으로 이전되었다가, 훼손과 위험의 가능성이 있어 2005년 미추홀 공원으로 이전하였다.
문학산성은 문학산 정상에 있는 석성으로 미추홀 고성 또는 남산성으로 불리고 있으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사강목』, 『여지도서』에 문학산은 미추왕의 도읍지로서 석성 터가 있고 성내에는 비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천부 읍지』에는 임진왜란 때 인천도호부 부사 김민선과 김찬선이 고성을 수리하여 주민들을 이끌고 왜군을 격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성내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성벽이 붕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시대 관아 유적으로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다. 1982년 3월 2일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인천도호부 관아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에 자리하고 있다. 『인천부 읍지』에 의하면 객사, 동헌, 내동헌, 삼문, 사령청, 향청, 군관청, 훈무당, 옥사, 어용고, 군기청 등 15~16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객사(客舍)의 일부와 19세기 초 건물인 동헌(東軒) 및 후대에 세워진 창고만 남아 있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강희맹이 쓴 『인천부 승호기(仁川府陞號記)』에 의하면 1424년(세종 2)에 이미 관아가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건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을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객사 지붕의 기와에서 나온 ‘강희 16년(1677년)’이라는 명문에서 이때 중수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50년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이전 개축하여, 당초 건물들의 배치나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인천도호부 관아 의 당초 건물은 손상이 심각한 주요 부재 등을 전면 해체 수리 후 복원하는 사업으로 2003년부터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다. 2004년에 공사를 마무리하여 현재는 학생들의 체험 학습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의 인천도호부 관아는 인천광역시에서 전통 문화재 복원 사업의 하나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349-3번지 일원에 축조한 것이다. 199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객사, 동헌, 아문, 상문 등 7개 동을 짓고, 2001년 10월 14일에 개관식을 가졌다.
인천도호부 관아 인근에 조선 시대 유교 문화재인 인천 향교가 있다.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 및 중국의 성현을 모시는 제사 기능과 학생들을 교육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전통 교육 기관이다. 1941년에 일제는 하나의 부(府) 안에 두 개의 향교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곳을 폐교시켰다. 인천 향교에 있던 위패는 불태워지고 문서와 비품은 부평 향교로 옮겨졌다. 인천 향교는 광복 후인 1946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인천 향교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고, 15세기 중반에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주요 건물들은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1955년과 1964년에 중수되었으며 1967년 삼문과 대성전,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현재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 남아 있다.
인천 향교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사설 교육 기관으로 학산 서원(鶴山書院)이 있었다. 학산 서원은 문학산 북쪽 기슭에 위치했던 기관이다. 인천도호부 도호부사로 재임했던 이단상(李端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8년(숙종 34)에 창건하였다. 서원의 완공과 함께 ‘학산(鶴山)’이라는 친필 액호를 내린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 규모는 향교와 비슷했던 것으로 전한다. 이단상과 그의 아들 이희조(李喜朝)를 배향하였으며, 지역 내의 사설 교육 기관이자 도서관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871년(고종 8)에 단행된 서원 철폐에 따라 훼철되고, 이후 일제의 조선 강점 속에서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그 터만 남게 되었다.
1949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학술 조사에서 ‘학산 서원’이라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그 주변에서 재실과 강당, 사당의 건물 주춧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확장과 함께 다시 유실되었고, 문학산 터널 공사로 인하여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2002년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에서 문학산 일대 역사 유적에 대한 용역 사업을 시행하고, 인하 대학교 박물관이 학술 조사를 하여 다시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 2004년 9월에 ‘학산 문화원 남구 역사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표지석을 설립하였다.
근대 문화유산으로는 2006년 4월 14일에 등록 문화재 제247호로 등재된 대한민국 수준 원점(水準原點)이 있다. 수준 원점은 국토 높이 측정의 기준점이 되는 국가적 중요 시설물로, 바닷물의 간만의 차이를 일정 기간 동안 관측하여 얻은 평균값인 평균 해수면이 기준이 된다. 평균 해수면의 고정된 높이와 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설치한 표석이 수준 원점이 된다. 이 수준 원점을 기준으로 국도 및 중요 지방 도로를 따라 4㎞마다 1등 수준점이 설치되며, 1등 수준점을 기준으로 2㎞마다 2등 수준점이 설치된다. 이 수준점은 각 지역의 높이 값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준 원점은 1914년에서 1916년까지 3년간의, 인천광역시 앞바다의 평균 해수면 측정치를 기준으로 만들었다. 광복 후 내무부 토목국에서 이전에 사용하던 성과표를 이용하여 파괴된 수준점을 복구, 이용하였으나, 6·25 전쟁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다. 새로운 수준 원점은 1963년 12월에 국립 건설 연구소에서 인천광역시에 설치하였고, 국립 지리원은 1974년부터 1등 수준점 측량 사업에 착수하여 전국의 수준점을 보완하고 있다.
수준 원점 은 인천광역시시 중구 항동1가 2번지에 설치되었다가, 1963년에 현재의 위치인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인하 공업 전문 대학 구내로 이전되었다. 둥근 받침돌 위에 화강석으로 된 육면체의 설치대를 얹고, 그 위에 부착된 자수정에 음각 십자 표식으로 수준 원점을 표시하였다. 붉은 벽돌로 쌓은 원통형 보호각으로 수준 원점을 보호하고 있다.
은율 탈춤 은 1978년 2월 23일에 중요 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은율 탈춤은 황해도 은율 지방에서 전래된 것으로 봉산 탈춤, 강령 탈춤과 함께 해서 탈춤에 속한다. 주로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추석, 섣달그믐, 설날 등에 행해진다. 은율 탈춤은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여 섬에 갔던 사람들이 섬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탈을 쓴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은율 탈춤 은 벽사(辟邪), 불교의 타락 풍자, 양반에 대한 조롱·풍자, 처첩(妻妾)의 갈등 관계 및 서민 생활의 애환 등을 내용으로 하며, 호색적인 면이 심하다. 놀이마당은 ‘사자춤’, ‘헛목춤[상좌춤]’, ‘팔목중품’, ‘양반춤’, ‘노승춤’, ‘미얄할미영감춤’의 6개 과장(科場)[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22명의 인원이 출연한다. 공연에 쓰이는 가면은 귀신 얼굴형의 탈과 인물 탈 24종류가 있다. 탈의 혹 주위에 5가지 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의 다섯 방위 신을 뜻하는 것으로 잡귀의 침범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다.
은율 탈춤 은 장용수[1903~1997], 장교헌[1894~1975] 등 6·25 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온 놀이꾼들에 의해 남한에서 놀이가 복원되었다. 1975년 장교헌이 작고한 후 장용수, 김춘신(金春信), 민남순이 춤 전수 교육실을 차리고 전승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978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고, 1982년에는 인천직할시를 전승지로 지정받았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수봉 공원 안에 은율 탈춤 전수관이 있으며, 은율 탈춤 보존회를 두고 활발한 전승 활동을 하고 있다.
1978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는 기능 보유자로 장용수[영감·양반역 및 가면 제작]와 김춘신[헛목·상좌역 및 의상 제작]이 있었다. 이후 김영택[2000년 별세], 민남순[노승새맥시, 상좌, 의상 제작, 2013년 별세], 김춘신[2015년 별세]이 기능 보유자로 활동하였다. 2018년 현재 차부회, 박일흥이 기능 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정식 명칭이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인 서해안 풍어제는 1985년 2월 1일 중요 무형문화재 제82-나호로 지정되었다. 풍어제는 어촌 마을이나 배를 부리는 집에서 매년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행하는 굿을 말한다.
서해안 풍어제는 배연신굿과 대동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연신굿은 선주(船主)들이 배와 선원의 안전,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배 위에서 이루어지는 무당굿을 말하며, 대동굿은 마을 공동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 협동과 화목을 기원하던 마을굿을 말한다.
배연신굿은 두 가지의 유래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임경업 장군과 관련한 것이다. 임경업 장군이 전쟁에 패한 후 병사들을 거느리고 연평도로 건너갈 때 병사들이 굶주리고 지쳐 더 이상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무도의 땜슴이라는 곳에서 병사들에게 일종의 가시나무인 뽀루스나무를 꺾어 오게 한 후 썰물 때 몰골에다 세워 놓고 손수 축문을 외워 조기떼를 잡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땜슴을 무사히 건너가게 하였다. 그 이후로 임경업 장군을 숭배하여 서해안 일대의 각 섬마다 사당을 짓고 임경업 장군을 신으로 섬기게 되었고, 이때부터 배연신굿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유래는 백령도 앞바다의 장산곶은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는 곳으로 배들이 이곳을 지날 때 돼지 한 마리씩을 물속에 넣고 배의 안전을 기원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배연신굿은 주로 음력 정월과 2월 사이에 열린다. 선주들이 비용을 대고 배 안에서 굿이 행해진다. 굿은 ‘신청울림[신을 청하는 굿]’으로 시작하여 ‘당산맞이’, ‘부정풀이 부산띄우기’, ‘초부정 초감흥굿’, ‘영정물림’, ‘소당제석굿’, ‘먼산장군놀이’, ‘대감놀이’, ‘그물올림, 영산할아밤 항맘’, ‘쑹거주는굿’, ‘다릿발 용신굿’, ‘강변굿’까지 12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동굿은 황해도 벽성군, 황해도 옹진군·홍미면·동남면·해남면·해남면·동강면 등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마을굿이다. 각 고장마다 굿하는 시기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보통 3년에 한 번 또는 매년 굿을 한다. 대개 정월 초사흘에 굿 날을 받아 보름날을 전후로 사흘에서 닷새 동안 굿을 하게 된다. 굿의 준비와 진행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치룬다.
대동굿은 ‘신청울림’을 시작으로 ‘당산맞이’, ‘세경돌기[지신밟기]’, ‘문잡아 들음’, ‘초부정, 초감응굿’, ‘영정물림, 복잔내림’, ‘제석굿’, ‘소대감굿’, ‘사냥굿, 생타살굿’, ‘말명굿’, ‘익은타살굿’,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 ‘성수거리’, ‘조상국’, ‘영산대감, 서낭굿’, ‘걸립대감’, ‘뱃기내림’, ‘조상굿’, ‘서낭, 목신굿’, ‘영산할아밤, 할밤’, ‘뱅인영감굿’, ‘벌대동굿’, ‘강변 수살 용신 송신굿’까지 24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기·예능 보유자로 김금화(金錦花)[무녀(巫女)], 최음전(崔音全)[악사(樂士), 2007년 별세], 안승삼(安承三)[배치기노래·장식, 2008년 9월 24일 별세]이 지정되었다. 정옥련, 김경화, 이옥자, 김매물 등 제자들과 함께 무업(巫業)을 계속하고 있다
[산업]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갯골 일대 간석지는 간척에 의해 염전과 농경지로 활용되다가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 계획과 더불어 공업 단지로 변모되었다. 용현동과 학익동 등 서부 해안 인접 지역에는 전자·화학·유리 등의 공업 지역, 북부의 도화동과 주안동 일대에는 목재 및 가구 제조·전자 기계·화학·유리 등의 공업 지역이 조성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입지한 산업 단지는 주안 국가 산업 단지[한국 수출 산업 공단 제6단지], 인천 지방 산업 단지, 인천 기계 산업 단지 등 세 곳이다.
주안 국가 산업 단지는 한국 수출 산업 공단의 제5단지와 제6단지를 말한다. 제5단지는 주안의 폐 염전 지역을 매립하여 조성한 곳이고, 제6공단은 인천 비철 금속 공업 단지로 땅고르기 작업 중이던 터를 편입시킨 곳이다. 위치적 특성 때문에 주안 국가 산업 단지라고 한다.
인천 지방 산업 단지는 도화동과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일대에 있는 공업 단지로 인천 제3공단으로도 불린다. 인천광역시 중심부와 인천항에서 5~6㎞의 거리에 있으며 경인고속도로 인천 인터체인지 주변 일대에 새로운 공업 단지를 제공하여 시내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공장들을 재배치하고 항구 도시 기능을 확충하고자 조성되었다.
인천 기계 산업 단지는 인천 지방 산업 단지에 인접해 있고, 인천광역시 내에 흩어져 있는 중소기업형 기계 공장의 집단화로 도시 공해 방지는 물론 계열 분업화에 따른 경영 합리화를 목적으로 조성한 기계 공업 전문의 민간 공업 단지이다. 인천 지방 산업 단지와 함께 1965년에 공업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공단 지역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면적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조립·금속, 기계, 목재, 화학 등 2차 산업이 중심이다. 기타 기계 및 장비, 영상, 음향 및 통신 장비, 조립 금속, 화학물 및 화학 제품, 목재 등이 높은 고용 비중을 보인다.
국제 통화 기금(IMF) 경제 위기 이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광공업은 사업체 수는 증가하였지만 종사자 수나 생산액은 뚜렷한 증가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부가 가치 액의 경우는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제조업의 소규모화 및 생산성 저하로 제조업 기능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광역시의 행정·교육·문화의 집중 지역이며, 교통·주거 및 상업권의 발달 지역으로, 대표적인 상업 시설은 시장과 대규모 소매점이다. 관내에는 주안역 지상 상권, 주안역 지하상가 상권, 석바위 상권, 제물포 상권, 신기촌 상권, 용현 시장 상권, 인하 대학교 상권, 제일 시장 상권의 8개 지역 상권이 있다.
주안역 지상 상권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상권이며, 인천광역시 내 3대 상권[주안역, 부평역, 동인천역] 중 하나이다. 주변에 대형 사무실이 밀집해 있고 입시 학원과 보험 회사 등이 있어서 대중이 모이는 중심 상권이다. 지리적으로 인천광역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청년 및 장년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며, 신세대 활동의 본거지라 불릴 수 있는 로데오 거리, 2030 거리로 불리는 주점가가 잘 발달된 상권이다.
주안역 지하상가 상권은 상권 자체가 경인선 주안역의 역세권과 맞물려 있어, 항상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주안역 지하상가 내에는 집단 식당가를 비롯하여 의류점, 기타 잡화, 신발, 가죽 제품, 생필품, 휴대폰, 화장품 등을 판매하는 다양한 상점이 분포되어 있다.
석바위 상권은 석바위 사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서민 생활 중심의 생필품 유통 및 시장 중심형 상권으로 형성된 상권이다. 재래시장형 상권이면서 복합 업종 상권으로 발달되어 고른 업종 분포를 보인다. 인천광역시청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제물포 상권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제반 학군이 인접해 있어 신세대 유동 고객이 항상 붐비는 지역으로 대학가 상권과 역세권이 혼합되어 있다. 제물포 상권은 2007년 역세권 재정비 촉진 지구로 지정되었으나, 공영 개발을 두고 주민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2010년 초 별다른 대책 없이 지정을 해제했다. 그로 인해 상권이 붕괴되어 지역 상권 활성화를 위한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최근 옛 도심 상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신기촌 상권은 재래시장 중심 상권으로, 아파트 밀집 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주로 생필품과 농산물과 수산물 판매를 위주로 한 소매점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용현 시장 상권은 재래시장형 상권으로 복잡하고 무질서한 상권 구조로 되어 있다. 생필품이나 서민 생활 용품들이 분포되어 있다. 인근에 물텀벙이 거리가 있다.
인하 대학교 상권은 대학가 상권으로, 상권의 범위가 크지는 않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제일 시장 상권은 주안역 역세권이나 석바위 상권의 활성화로 인하여 상권이 이동되어, 쇠퇴기에 이른 상권이다.
그 밖에 시장과 대규모 소매점이 있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백화점과 대형 유통 업체의 등장으로 재래시장은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2005년 말을 기준으로 일반 시장은 20개소, 쇼핑센터 2개소가 있으며, 백화점은 1997년 11월 20일에 개점한 신세계 백화점 인천점으로 인천 종합 버스 터미널 옆에 있었다. 2009년부터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2011년 4월 새 단장을 마쳤다. 지하 1층과 지상 6층의 건물로, 주차 빌딩을 갖추고 있다. 쇼핑 공간과 함께 건물 5층에는 신세계 문화홀, 신세계 아카데미, 신세계 갤러리가 있고, 6층에는 전문 식당가가 이어지는 스카이 파크가 있다. 신세계 백화점 인천점은 2018년 12월 영업을 중단하고, 그자리에 2019년 롯데 백화점이 들어섰다.
[교통]
인천광역시는 수도인 서울특별시의 관문 도시일 뿐 아니라, 인천광역시 지역과 인근의 경기도 시흥시·안산시·수원시·평택시, 충청남도 아산시 등에 있는 업체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원자재의 수입항이며, 외국으로 수출되는 각종 화물의 수출항으로 각종 교통 인프라가 풍부한 지역이다. 동양 최대의 갑문식 독 시설,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와 인천 국제 공항, 경인선 철도, 인천 도시 철도, 경인 고속 도로와 제2 경인 고속 도로, 서울 외곽 순환 고속 도로 등 항만, 항공, 철도, 도로 등의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경인선 철도와 경인 고속 도로가 구의 중심부를 통과하며 핵심 교통로를 이루고 있다. 경인선 철도는 주안역, 도화역, 제물포역을 따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동서를 횡단하고 있다. 경인선 철도는 1899년 9월에 개통된 인천광역시와 서울특별시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처음에는 화물 운송을 주목적으로 한 철도였으나, 점차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를 잇는 교통수단이 되면서 수요가 높아졌다. 이 때문에 1960년대에는 복선화되었고, 1974년에는 전철화되어 지하철과 직결되었다. 1990년대에는 철도의 복복선화가 이루어지고, 간석역, 부개역, 도원역, 소사역이 신설되었다. 경인선 철도는 근대화 과정에서 상업 중심지를 형성하는 경제적 부흥을 가져왔다.
고속 도로는 경인 고속 도로와 제2 경인 고속 도로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통과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북쪽을 통과하는 경인 고속 국도는 1968년에 개통되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서울특별시 양천구를 연결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간의 수송 수요 급증에 대비하여 건설된 한국 최초의 고속 국도이다. 본래 4차선 도로로 건설되었으나, 교통 수요의 증가로 인하여 왕복 4차선에서 6차선 내지 8차선으로 확장되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는 도화 인터체인지를 통해 연결된다.
제2 경인 고속 국도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남쪽 문학산 북쪽 비탈을 따라 지나는 도로로, 인천광역시 중구부터 경기도 안양시를 잇는 고속 국도이다. 1990년에 착공하여 1994년 7월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과 경기도 광명시 사이의 도로가, 1995년에는 경기도 광명시와 경기도 안양시 사이의 도로가 개통되었다. 제2 경인 고속 국도가 건설됨에 따라 인천광역시의 교통이 남쪽 외곽으로 분산되었으며, 서울 외곽 순환 고속 도로·서해안 고속 국도·영동 고속 국도 등 다른 고속 국도와 연결되어 전국 각지에서 인천항을 통한 물류의 원활한 수송이 가능해졌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문학 인터체인지와 학익 인터체인지를 통해 출입할 수 있다.
이처럼 인천광역시의 주요 도로는 동서를 관통하는데, 이는 서울특별시와의 연결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로 구조는 도시의 균형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도심 교통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1990년대에 인천광역시 연수구와 인천광역시 남동구의 개발로 남쪽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남북을 잇는 대량 교통수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인천 도시 철도가 개통되기에 이른다.
인천 도시 철도는 1991년에 기획단이 발족되어, 1993년 7월엔 인천광역시청 앞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이후 6년여의 공사 끝에 1999년 10월 6일 북쪽의 귤현역에서 남쪽의 동막역까지 22개의 역으로 개통되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간석역, 주안역, 도화역, 제물포역이 있다. 인천 도시 철도는 앞으로 인천광역시 서구 검안동부터 인천 남동 공업 단지에 이르는 2호선과 서울특별시 구로구 온수동에서 인천 대공원에 이르는 3호선도 신설할 계획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재생 도시와 신생 도시의 연결 축으로 인천광역시의 중심 지역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통과하는 주요 간선 도로는 경인로, 경원 대로, 인주 대로, 아암 대로 등이 있다. 도로는 지역 사회의 문화 교류, 산업 경제, 사회 활동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도시 발전의 척도가 된다. 이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많은 재원을 투입해 도로의 축조, 확장 및 포장은 물론 육교, 고가교, 지하 차도, 교량 등의 확충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1년 구정 백서』에 따르면 도로의 총 길이가 382㎞에 이른다고 한다. 아울러 주요 간선 도로의 명칭에 지역 특성과 옛 지명 및 도로 기능, 성격 등을 살려 부여하여 애향심 고취와 일상생활의 편익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