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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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沸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이세호 |
[정의]
고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던 백제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형.
[개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어서 다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초기 백제의 연맹체적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연맹 초기에는 비류 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가, 한강 유역의 문화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한 온조 집단이 왕위를 차지하였던 것을 생각된다. 비류 집단을 흡수한 온조 집단이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한 마한 세력을 아우르면서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가계]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졸본 부여(卒本扶餘) 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낳은 두 아들 중 첫째이다.
[활동 사항]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비류(沸流)와 관련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한편 세주(細註)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조 비류왕은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인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태자로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위 기록들을 통해 볼 때 해상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다는 점 때문에 당시 비류가 미추홀, 즉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인천은 지형적으로 보면 서해로 둘러싸인 작은 반도이다. 옛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만에 있는 강화도까지 확대하여 본다면 고대로부터 해상 교통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인천 지역이 갖는 해상 교통의 이점은 백제 때 중국과의 교류 창구로 기능했던 데에서 알 수 있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해안 쪽 선단에 능허대(凌虛臺)라는 곳이 있다. 중국과의 통교를 위한 백제 사신을 실은 배의 출항지였다고 전하는 곳으로 1990년에 인천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보호 중이다. 이 능허대가 인천 지역이 갖는 해상 교통의 이점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한편 비류 집단이 오늘날의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소금 산지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소금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식품이었고 고대 사회에 있어서 소금 생산지의 확보는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바닷가인 인천은 근래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소금을 생산했던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결과적으로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짬에도 불구하고 미추홀에 정착한 것은 해상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란 점, 그리고 소금 생산지와 소금 교역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