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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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이세호 |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한국사 시대 구분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하였다. 첫째 왕조에 의한 구분, 둘째 시간 길이[遠近]에 의한 구분, 셋째 사회 구조·성격의 발전 과정에 의한 구분이다. 이 가운데, 시간의 길이에 따른 시대 구분, 즉 ‘3분법’으로 고대·중세·근대 시대 구분의 기준을 삼는 방법은 원근을 기준으로 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발전 관계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한국사에서 고대의 하한이 언제까지인가 하는 문제는 동시에 중세의 기점이 언제부터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다. 중세의 기점에 대해서는 통일 신라설[통일 신라를 기점으로 봄]과 나말 여초설[고려를 기점으로 봄]로 대변된다. 이 가운데 현재 개설서의 서술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나말 여초설이다. 나말 여초설은 사회 인류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친족 집단의 변화상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고자 한 김철준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김철준은 철기 사용을 계기로 씨족 공동체 사회가 붕괴되고 친족 공동체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부족 국가 혹은 이를 기초로 형성된 부족 연맹과 왕을 중심으로 성립된 고대 사회도 친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족장(族長) 세력의 정치적 지배가 관철되는 점에서 동질적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대 사회는 친족 공동체를 기초로 한 족장 세력의 지배 체제가 소멸됨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되고, 이후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한 관료제가 성립됨으로써 중세 사회로 전환되었다고 하였다. 요약하면 통일 신라까지의 사회를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고대 사회로 규정하고, 호족의 대두와 고려의 건국을 통해 이러한 고대적 사회 체제를 청산하고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인천 미추홀구의 고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산 발굴 조사에서는 4점의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원인천(原仁川)인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주안동, 문학동 등지에 10~11기 정도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유적․유물로 보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지역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천 지역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 미추홀(彌趨忽)과 관련하여서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비류(沸流) 집단이 남하하여 미추홀에 도읍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미추홀이 인천으로 비정(比定)된다. 비류가 오늘날의 인천 지역을 근거지로 택한 것은 인천이 해상 교통의 중심지이며, 소금 산지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미추홀은 이후 고구려 시대에는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불렀으며,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에도 계속 매소홀현이라 불리다가 경덕왕(景德王) 대에 소성현(召城縣)으로 개명되었다. 현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한 능허대(凌虛臺)는 서해 항로에서 인천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백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해상 항로의 중심지로서 인천의 역할은 통일 신라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황해를 이용한 해상 항로는 3가지 길이 있었는데, 이중 북부 연안 항로와 중부 횡단 항로가 인천 연안을 이용하는 항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