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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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景泰 |
영어공식명칭 | An Gyeongtae |
이칭/별칭 | 중첨(仲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조선 후기 밀양 출신의 자산가.
[가계]
안경태(安景泰)[1766~1826]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중첨(仲瞻)이다. 할아버지는 안명적(安命廸)이며, 아버지는 안인제(安仁濟)이다. 아들은 유학 안유중(安瑜重), 손자는 생원 안효완(安孝完)이다. 증손자는 고종 대 식년시에 합격한 안희원(安禧遠)이다.
[활동 사항]
안경태는 1766년(영조 42)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근검하여 빈곤한 상태에서 가산을 모았다. 덕이 두터워 고을에서 불우한 사람을 구휼하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안경태는 1826년(순조 26)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마을 사람들이 밀양 삽포[현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 안경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안씨의장비(安氏義庄碑)’를 세웠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산(台山)[단장면 태룡리] 안씨가 삽포에 터를 장만하였는데 삽포는 옛 고장이다. 그리하여 마을 안에 춥고 굶주린 자, 병들어 신음하는 자, 돈이 없어 혼인이나 장례를 제때에 못 치르는 자,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자, 그 모두 그분들의 힘을 입었다. 시초는 처사 휘 경태(景泰)가 그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 뒤에 성재(省齋) 휘 정중, 만포(晩浦) 휘 유중, 치와(恥窩) 휘 효완을 지나 승지(承旨) 시헌(時軒) 희원(禧遠)에 이르러 그 규모가 더욱 확장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은덕을 감사하게 여겨서 그 장(庄)을 의장(義庄)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의(義)란 대중과 함께한다는 뜻이다. 옛적에 의창(義倉), 의사(義社), 의학(義學), 의정(義井)이란 것이 모두 이러한 따위를 말한 것이다. 자사(子思)께서는 효(孝)란 사람의 뜻을 잘 이어받아 행하는 것이요, 주역(周易) 설괘(說卦)에는 사람의 도(道)를 세우는 것은 인(仁)과 의(義)라 하였는데 승지(承旨)는 이것을 아울러 실천하였다. 마을 선계 도 열호(都烈浩) 조갑규(曺甲奎)가 함께 의론하여 삽포 동구에 비를 세우면서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므로 이에 서하노라. 1905년(고종 42) 4월 그믐날 광주 노상직(盧相稷) 삼가 씀. 감수 안우달(安友達)·안종수(安鍾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