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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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이칭/별칭 | 유학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재식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계승 및 실천하고자 하는 학문적 활동과 의례적 행위 일반.
[개설]
유교(儒敎)는 공자(孔子) 등 유가(儒家)의 정치사상·학문 수양·일상 의례 등의 교훈을 실천하는 사상이자 종교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시기는 한자의 유입 시기와 동일하다. 유교는 삼국시대 이래로 정치사상을 위주로 발전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유교의 일파인 성리학(性理學)이 유입되자 개인 수양과 일상 의례 역시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자 모든 사회생활의 기준으로 작용되었다. 밀양 지역의 경우 조선시대에 이르러 향교(鄕校)·서원(書院)·사묘(祠廟)·제단(祭壇) 등의 건립, 사례(四禮)의 시행, 정려(旌閭)를 통한 장려 등으로 유교가 보급되고 정착되었다.
[통일 신라~고려시대]
유교는 고대 국가 건국과 아울러 수용된다. 통일신라 말에 당나라에 가서 유교를 배우고 귀국한 최치원(崔致遠)[857~?]이 부산 해운대를 방문한 바 있다. 비록 밀양에 관한 기록을 찾기 어려우나 이로써 당시 경상남도 일대에 유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밀양 지역에 향교(鄕校)가 건립되기 시작한다. 향교는 관청에서 관리하는 관학 교육기관이다. 1100년 경 고려 숙종 연간에 밀양 부북면 용지리에 밀양향교가 건립되었다. 밀양향교는 경주향교, 진주향교와 함께 영남 지역을 대표할 정도의 규모였다. 그러다가 조선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된 후 1602년 교동에 재건되었다.
[조선시대]
유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활발히 보급된다. 유교 정책에 따라 향교·서원(書院)·사묘(祠廟)·제단(祭壇) 등의 건립, 사례(四禮)의 시행, 정려(旌閭)를 통한 장려 등이 이루어진다. 조선 전기에 영남 지역에 이황(李滉)[1501~1570], 조식(曺植)[1501~1572] 등의 우수한 성리학자들이 배출되면서 유교 문명의 전성기를 이룬다.
이러한 맥락에서 밀양 지역에도 성리학이 보급된다. 조선 초 문장가 변계량(卞季良)[1369~1430]에 이어 사림파(士林派)의 종장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배출되었다. 김종직은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계승한 아버지 김숙자(金叔滋)[1389~1456]에게 수학하여 사림파의 종장이 된다. 김종직은 문장과 사학(史學)에 능통하고 절의(節義)를 중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잇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김종직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종직의 도학을 계승한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라는 별호로 불리며 조광조(趙光祖)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1864년 이후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학맥은 허전(許傳)[1797~1886]을 통하여 영남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김해부사(金海府使)로 김해에 부임한 허전은 향교에서 고례를 부흥시켜 유학 진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당시 허전에게 배움을 청한 영남 유생이 100여 명에 달하였다. 김해뿐 아니라 함안, 단성, 진주, 삼가, 창원, 고성, 함양, 초계, 의령, 칠원, 성주, 안동을 망라하였으며, 그 가운데 밀양도 있었다.
노상직(盧相稷)[1855~1931] 역시 허전의 김해부사 시절 제자 중 하나였다. 노상직은 허전의 문하에서 당대 영남 지역의 대표 학자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1894년 노상직은 창녕에서 김해로 이주하였고, 1895년 밀양의 금곡(金谷)에서 금산서당(錦山書堂)을 건립하였다. 1896년 현재 자암서당(紫岩書堂)이 있는 노곡으로 거처를 옮겨 ‘자암초려’를 짓고 학생을 가르쳤다. 그 후 잠시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다가, 다시 밀양으로 돌아와 자암서당을 건립하여 학생을 가르치며 선현의 문적을 간행하였다. 노상직이 사망하자 원근 각지의 제자들이 1,000여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