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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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溪祠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4길 27-4[금곡리 51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하강진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본촌에 있는 밀양박씨 절사공파 종중의 조선 후기 사당.
[개설]
금계사(錦溪祠)는 박유(朴㽕)[1576~1627]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 때인 1867년 후손들이 박유가 태어난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본촌 동쪽 산기슭에 건립한 부조묘(不祧廟)이다. 금계사 봉안문은 김해부사를 지낸 성재 허전[1797~1886]이 지었다. 부조묘는 부조위를 따로 모시는 사당을 일컫는다. 부조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를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이다. 불천지위(不遷之位), 불천위(不遷位)라고도 한다.
박유는 밀양박씨 충헌공파[파조 박척] 후손이며, 전법판서공파 파조 박밀양(朴密陽)의 11세손으로 절사공파 파조가 되었다. 박유는 산외면 죽원(竹院)에서 태어나 학문은 동향의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에게 배우고, 궁술은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에게 배웠다. 정유재란 때 일본 대마도에 잡혀가 오사카[大阪]로 옮겼다가 1605년 사명대사와 함께 환국하였고, 이후 무과 등제하여 봉사(奉事)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자진 출전하여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영조 때 경상도관찰사가 사연을 조정에 알려 ‘절사(節士)’ 시호를 받았고, 형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산외 출신의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1681~1752]이 내용을 상세히 알려 널리 알려졌다. 박유의 14세손 박수창이 1934년 간행한 『절사박공실기』가 전한다. 『절사박공실기』는 ‘박절사전’이라고도 부른다.
[위치]
금계사는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513번지에 있다. 금곡리 본촌 마을회관 뒤쪽의 산비탈에 난 길을 따라 300미터쯤 올라가면 사당이 있다.
[변천]
금계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하였다. 당시 기문은 장인근(蔣仁根)이 지었다. 1961년 전국 각처에 흩어진 박유의 후손들이 사당 제향 때마다 재계하며 모일 곳이 없자 재물을 모아 마을 이름을 딴 재사를 건립하였다.
[형태]
금계사는 맞배지붕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계사 앞편에는 후손들이 1961년 치제소(致祭所)로 지은 금양재(錦陽齋)가 있다. 금양재는 팔작지붕 형태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양재와 금계사 사이에는 중문이 있고, 금양재 동쪽에는 별도의 곁채가 있다.
[현황]
금계사와 금양재는 후손들이 잘 보전하여 건물 상태가 양호하다. 평소에 문을 잠가 놓아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의의와 평가]
금계사를 통하여 임진왜란의 전란상, 정묘호란 때 밀양의 대응 양상과 후인들의 선양 방식, 밀양박씨의 분포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