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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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民亭 |
영어공식명칭 | Deogminjeong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윤덕 |
건립 시기/일시 | 1450년 - 덕민정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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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592년 - 덕민정 임진왜란으로 소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542년 - 덕민정 현사 10칸 증축 |
현 소재지 | 덕민정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
성격 | 현사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좌우 각 3칸 |
소유자 | 광주김씨 일문 |
관리자 | 광주김씨 일문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에 있던 조선 전기 현사.
[개설]
덕민정(德民亭)은 덕(德)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기 위하여 세운 공해(公廨)[관가의 건물]라고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위치]
덕민정은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에 있었다.
[변천]
덕민정은 1448년 이백상(李伯常)이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하여 수산현(守山縣)에 공해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450년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3칸(間)의 건물을 지어 수산현의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좌우에 각각 3간씩 붙여 단청을 하였다. 덕민정이 있던 수산현은 남쪽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서 영남의 물산과 조운의 요충지였고, 따라서 수산현을 지나가는 사명(使命)이나 귀빈(貴賓)이 많았다. 이백상은 덕민정에서 귀빈을 영접하고 수산현의 공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주세붕(周世鵬)의 「남수정기(攬秀亭記)」에 의하면 덕민정은 현사(縣舍)로서 전용하였고, 남수정은 빈객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1542년에는 부사 박세후(朴世煦)[1493~1550]가 덕민정의 서북쪽에 현사 10칸을 증축하여 공해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렸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덕민정은 소실되었고, 임진왜란 후 유지(遺址)에 남수정과 수산창(守山倉)만 중건되었다.
[현황]
덕민정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은 상황이었다. 숙종 때 낙동강의 범람을 관측하여 수산창에 불을 질러 들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구한 영장(營將) 김기(金淇)의 공(功)을 표창하여 덕민정과 남수정의 구허(舊墟)를 김기에게 하사하였다. 이후부터 덕민정 일대는 광주김씨(廣州金氏) 일문의 사패지(賜牌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덕민정은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수산현(守山縣)의 공무를 관장하고 빈객들을 영접하였던 공간으로서의 수려한 모습은 오늘날 기록 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