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1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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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溟堂傳 |
영어공식명칭 | Story of Samyeongda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훈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26년 - 「사명당전」 덕흥서림에서 『서산대사와 사명당』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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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26년 - 「사명당전」 영창서관에서 『님진병난 사명당실기』 발행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28년 - 「사명당전」 회동서관에서 『도승 사명당』 발행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28년 - 「사명당전」 신구서림에서 『사명당전』 발행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54년 - 「사명당전」 영화출판사에서 『임진왜란 사명당전』 발행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58년 - 「사명당전」 대조사에서 『서산대사 사명당전』 발행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62년 - 「사명당전」 세창서관에서 『사명당전』 발행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78년 - 「사명당전」 향민사에서 『임진왜란 사명당전』 발행 |
관련 지명 | 사명대사 유적지 관광단지 생가지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2길 17-5[고라리 250] |
성격 | 고전소설 |
주요 등장 인물 | 사명대사 |
[정의]
경상남도 밀양 출신인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이야기로 엮은 고전소설.
[개설]
「사명당전(四溟堂傳)」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1544~1610]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1920년대 이후 딱지본 형태로 간행된 판본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판본]
「사명당전」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덕흥서림(德興書林), 영창서관(永昌書館) 등 여러 출판사에서 펴냈다. 우선 1920년대에는 네 종이 간행되었는데, 1926년 덕흥서림에서 발행한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최초로 사명당 이야기를 소재로 펴낸 딱지본 고전소설이다. 1926년 영창서관이 발행한 『님진병난 사명당실기』는 사명당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이며, 그 뒤 1928년 회동서관(滙東書館)의 『도승 사명당』, 1928년 신구서림(新舊書林)의 『사명당전』 발행에 영향을 끼쳤다. 해방 이후에도 「사명당전」은 꾸준히 발행되었는데, 1954년 영화출판사(永和出版社)에서 『임진왜란 사명당전』이 발행되었고, 1958년 대조사에서 『서산대사 사명당전』이 발행되었다. 또 1962년 세창서관(世昌書館)에서 『사명당전』이 발행되었고, 1978년 향민사(鄕民社)에서 『임진왜란 사명당전』이 발행되어 널리 읽혔다. 영화출판사본은 독자의 흥미를 고려하여 구비문학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 판본이며 대조사본과 향민사본에 영향을 끼쳤다.
[내용]
「사명당전」의 이야기는 판본에 따라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덕흥서림본 갈래인데, 문헌 기록에 충실한 판본이다. 다만 덕흥서림본은 스승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04]에 대한 내용이 상당한 비중으로 전개되고, 상대적으로 사명당의 출가 내력 등의 비중은 간략하다. 대신 사명당(四溟堂)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임진왜란 시기 선조(宣祖)[1552~1608]의 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와 담판하여 왜군을 철군시키는 내용을 중심으로만 서술되었다. 사명당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판본으로는 영창서관에서 발행한 『님진병난 사명당실기』가 있다. 영창서관본은 이후 출판되는 「사명당전」의 모본과 같은 기능을 하는데, 사명당 출가의 계기가 되는 가정의 비극 서사가 영창서관본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사명당전」은 판본마다 이야기의 편차가 있으나, 여러 판본을 종합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밀양현 동촌(東村) 사람 임유정(任惟政)은 지력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향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7세에는 이 참판의 큰딸과 혼인하고, 이듬해 태평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듬해 이씨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동서 붕당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임유정은 과거를 포기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때 이씨 부인이 병들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임유정은 김씨와 재혼하여 3년 뒤 아들을 얻었다. 전처의 아들이 장성하여 한선명의 큰딸과 혼인을 하였는데, 첫날밤에 신랑이 목 잘린 변사체로 발견되어 신부가 누명을 썼다. 임유정은 아들이 죽자 칩거하고, 대신 김씨 부인이 집안을 좌지우지하였다. 며느리는 억울하여 자결하려다 원수 갚을 결심을 하고 집을 나가 방물장수로 돌아다니다가 진주에 사는 늙은 이 첨지 부부의 수양딸이 되었다. 우연히 이 첨지로부터 남편을 죽인 것은 김씨의 사주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밀양으로 돌아가 시아버지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렸다. 임유정이 아들의 머리를 다락 속 항아리에서 찾아내자, 며느리는 자결하였다. 그 뒤 임유정은 김씨 모자를 방에 가두고 불 질러 죽이고, 하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뒤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유정은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후 강화사로 일본에 건너가 왜왕(倭王)과 담판 지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협과 여러 시험을 모두 이겨 내고 협상을 마무리한 뒤, 포로 3,000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이에 선조가 유정에게 ‘사명당’이라는 법호(法號)를 내렸다.
[의의와 평가]
「사명당전」은 근대 계몽기에 저술이 확대되는 역사 전기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일제의 식민 지배 체제가 구축되면서 영웅 출현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외국의 애국적 영웅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 인물에 대한 전기가 활발하게 저술되었다. 「사명당전」도 이러한 바탕에 힘입어 활발하게 발행되고, 유통되었다. 그러나 근대 계몽기의 역사 전기와는 달리 딱지본 고전소설 「사명당전」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색채가 퇴색되고, 상업주의와 맞물려 흥미 위주의 통속성을 추구하였다. 인물 전기를 바탕으로 하되, 구비 설화에서 전승되는 사명당의 신이한 능력을 비롯한 설화적 요소, 가정 비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복수 모티프들을 적극 수용하면서 허구성이 확대되고 통속성이 짙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널리 향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