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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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寫眞 |
영어의미역 | Photography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제협 |
[정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사진과 관련된 역사와 현황.
[개설]
사진은 빛을 매체로 하여 물체의 상을 감광성 기록 재료 위에 기록하는 방법 또는 그 방법으로 얻은 화상을 말한다. 즉 가시광선·자외선·적외선·감마선·전자선 등의 작용을 이용하여 감광층(感光層) 위에 물체의 반영구적 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사진은 빛으로 그린다는 의미의 라틴어로서 카메라를 이용하여 사물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카메라를 통한 사물과 현실의 기록과 표현이라는 사진은 시간이 흐를수록 복제나 시각적인 전달 매체를 통하여 사회의 각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그 역할이 점차 증대되어 가고 있다. 사진과 관련된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역사와 현황을 주요 사진관과 동호회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변천]
1. 여명기의 강경광채회(江景光彩會)
논산 지역의 거의 모든 근·현대 문물과 마찬가지로 사진도 강경을 통하여 처음 논산 지역에 소개 되었다. 1937년 동경 아시히신문사에서 발간한 『아사히 카메라』라는 잡지에 소개된 「전국 사진단체 명부」에 우리나라 서울과 지방의 사진동호회들이 소개되어 있으며 여기에 강경광채회(회원 17명)가 지방에서 회원이 많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단체인 것으로 나와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 강경에서의 사진 활동은 강경에 와있던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사진기를 가지고 가족사진은 물론 예술 작품사진도 촬영했을 정도였음은 물론 영업을 위해 강경에서 이미 사진관을 운영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강경의 노인들의 기억에 의하면 홍교동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후지다사진관이 있었는데 8·15 광복 후 주인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폐업했다고 한다.
2. 논산 지역 사진의 선구자 유석영
1941년 논산 지역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석영(柳錫永)이 강경 홍교동에 전원사진관을 개업했다. 유석영은 1919년생으로 1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오리엔탈 사진학교를 수료했으며 당시 사진 수정(修整)의 대가였던 이토[伊藤]에게서 수정기술을 사사받았다. 그 후 일본 황실 지정사진관인 도죠사진관에 근무 하다가 1939년 귀국하여 전원사진관의 개업과 더불어 사진예술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개업 이후 강경상업고등학교, 강경여자고등학교의 앨범 제작 등으로 번창하던 전원사진관은 한국전쟁으로 강경 지역 전체가 심한 폭격을 당하게 되면서 같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재산상의 피해와 함께 그때까지 모았던 사진자료들 마저 모두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폭격으로 인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전란 당시는 물론 휴전 이후에도 신분증의 검문이 강화되면서 도민증(道民證, 현 주민등록증)의 발급이 의무화되고 여기에 첨부할 증명사진의 수요가 폭증하게 되면서 전원사진관을 비롯한 논산 지역의 사진관들이 때 아닌 호황을 맞으면서 전란의 피해를 상당부분 복구할 수 있었다. 이후 논산 지역 사진의 선구자 유석영은 1985년에 이르러 6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3. 강경 지역의 주요 사진관
해방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까지 강경의 대표적인 사진관으로는 옥광사진관과 금강사진관이 있었으며 동원사진관(성윤치), 평화사진관(최봉학), 국제사진관 등도 명멸하였다. 현재 강경 지역에는 6개의 사진관이 영업 중이며 이중 태양사진관의 한광석은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 사진 자료와 1960년대 강경 지역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자료들은 강경젓갈축제를 비롯한 여러 행사 때 판넬로 제작되어 전시되는 등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4. 논산읍의 상징 박애사진관
논산읍(현 취암동과 부창동) 지역의 경우 일본인이 운영하던 야마가와[山川] 사진관이 있었으나 한국인이 운영하는 사진관은 일본 동경사진기술전문학교를 수료하고 고향인 진주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다가 1941년 논산으로 이사 온 김상술이 개업한 박애사진관이 처음이었다. 당시는 인물 사진이 대부분이고 또 인물사진에는 수정(修整)이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으며 이 수정술이 사진관의 운명을 좌우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김상술도 이 수정술에 관한 한 최고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었고 많은 사진사들이 와서 배워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는 사진관에 와서 사진을 찍는 경우 보다는 관공서의 행사, 가정의 회갑잔치, 돌잔치 등 현장에 직접 출장을 가서 사진을 찍어주는 이른바 출사가 많았었는데 사진 값을 현물인 곡식으로 주는 경우도 많아서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는 올망졸망한 곡물자루가 가득 실려 있었다”고 김상술의 큰딸 김덕연이 당시 상황을 회상해서 알려주었다.
이후 이 사진관은 사진사로 일하던 윤석환이 1978년 상호와 기자재 등을 인수하여 장소를 옮겼으나 아직도 박애사진관이란 상호로 영업을 계속 하고 있다. 한편 8·15광복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에는 미원사진관(박노을), 은하사진관(장상기) 등도 있었지만 현재는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리고 과거의 논산읍이었던 현 취암동과 부창동 지역에는 모두 12개의 사진관이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진동호회]
1979년 논산에서 사진을 좋아 하는 6인이 놀뫼사진회라는 동아리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논산사진협회가 태동하였다. 이후 논산 지역에도 논산교사사진연구회, 연무사우회, 라이카사진회 등 많은 사진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단체 간의 활발한 교류와 전시회 개최를 통한 왕성한 활동이 토대가 되어 1992년 1월 11일 한국사진작가협회 논산지부가 결성되어 더욱더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