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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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興宗敎運動 |
영어의미역 | New Religious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은지 |
[정의]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기성 종교에 대하여 전개된 새로운 종교운동.
[개설]
우리나라의 신흥종교는 300~400개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수적으로 다양하고 각기 계통을 달리함에도 불구 여러 특징들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내용만 다를 뿐 그 내적 구조는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동일해 보일 정도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신흥종교운동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개항기, 일제강점기, 1960~1970년대의 산업화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신흥종교운동은 동학계, 증산계, 단군계가 주류를 이룬 가운데 유교계, 불교계, 남학계(南學系), 기독교, 무속계의 신흥종교운동도 많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들 신흥종교운동은 주로 정감록이나 남조선신앙 등과 같은 종말론적 대망사상이나 미륵신앙 및 운세사상 등을 기반으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표방하여 왔다. 즉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상이 복원되는 새 시대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세력들이 물러가고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도래함을 설파해 왔던 것이다.
논산 지역에 있는 계룡산은 우리나라 신흥종교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명소이다. 이미 신라시대부터 5악 중의 하나인 서악(西岳)으로 지칭된 이후로 풍수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새로운 도읍지로 자주 예언되어 수많은 종교 집단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현재는 국군 계룡대가 들어와 대부분의 종교 집단들이 이전하였으나 그 이전에는 계룡산 신도내(新都內, 신도안)를 중심으로 많은 신흥종교가 성행하였던 각종 신흥종교운동의 집산지였다.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지만 계룡산 주위는 여전히 신흥종교가 성행하고 있다.
[신흥종교운동]
현 계룡시 두마면인 계룡산 신도안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전개된 논산 지역의 신흥종교운동은 일제강점기 논산 지역의 유교, 불교, 선교, 혹은 조선 후기의 정감사상, 수운 최제우의 동학사상, 증산 강일순의 증산사상, 일부 김항의 정역사상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신흥종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운동이었다.
이와 같은 많은 신흥종교 집단들이 집중적으로 신도안에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는 1924년경으로 동학 분파의 한 신흥종교인 시천교의 3대 교주였던 김연국이 두마면 용동리에 상제교 교당을 설치하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도안의 대부분 신흥종교들은 적극적인 운동에도 불구, 일제에 의해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상제교의 경우 일제 경찰의 자료에 의하면 일제에 헌금을 납부하고 기도회를 개최하는 등의 협력을 통하여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받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했으나 내부 갈등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말기에 교세가 급격하게 약화되면서 결국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신도안의 많은 신흥종교운동들이 주로 보안법 위반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매우 빈번하게 곤욕을 치렀던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는 우선 정교도의 교주였던 이순화의 장남 진영수가 1938년 3월에 조선총독 앞으로 반전적 진정서를 우송하고 반전기도회를 개최했다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도 하였다.
성도교 신자였던 이민제는 1938년 1월 성도교 간부 1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입불식에서 가까운 장래에 괴질이 발생하여 조선민족은 전멸할 것이며 이후 성도교를 신봉하는 신통자가 조선을 통치하고 고위고관으로 나갈 것이라고 불온한 선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기도 하였다. 이후 해방과 더불어 신도안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흥종교운동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는 활기를 보이기도 했으나 그 이후로 다시 시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