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977 |
---|---|
한자 | 六谷集 |
영어음역 | Yukgokjip |
영어의미역 | Collected Works of Seo Pilwon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병찬 |
성격 | 문집 |
---|---|
저자 | 서필원 |
간행자 | 서영지(徐榮智) |
간행연도/일시 | 1865년 |
권수 | 6권 |
책수 | 3책 |
사용활자 | 완영인서체자(完營印書體字) |
가로 | 20㎝ |
세로 | 31.5㎝ |
표제 | 六谷先生遺稿 |
소장처 | 규장각 |
소장처 주소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 56-1[관악로 1] |
[정의]
1865년(고종 2)에 간행된 조선 중기 논산 지역에 세거한 서필원의 문집.
[편찬/발간 경위]
서필원(徐必遠, 1614~1671)의 아들인 서경조(徐敬祖)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중에서 저자의 소장(疏章) 70편과 계사(啓辭) 12편을 찾아내고, 또한 남은 시문을 수습해서 선사(繕寫)하여 집안에 보관해 두었다. 1790년(정조 14) 서필원의 증조부인 서익(徐益)의 『만죽헌집(萬竹軒集)』이 간행된 뒤, 문중에서 서필원의 문집, 조부 서용갑(徐龍甲)의 문집, 아들 서경조(徐敬祖)의 문집인 『삼세유고(三世遺稿)』의 간행을 시도하였다. 그 후 6세손 서영지(徐榮智)와 서영인(徐榮仁) 등이 가장본(家藏本)을 바탕으로 부록문자를 정리하고 이약우(李若愚)의 서(序)와 김기찬(金基纘)의 발(跋)을 붙여 1865년 간행하였다.
[서지적 상황]
현재 규장각(奎1775), 장서각(4-6385),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228, 한46-가228-2),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연보의 판차(板次)와 내용이 약간 다른 것으로 보아 인출 초기에 교정과 검토를 거친 후 내용을 수정하여 다시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활자본의 경우 조판과 인출까지의 기간이 목판본에 비해 상당히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지므로 다시 인출하였더라도 간행 시기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형태]
6권 3책이며, 활자본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모두 ‘육곡선생유고(六谷先生遺稿)’이다. 계선 형태는 이어진 계선이다. 장정법은 선장본, 지질은 닥종이, 어미는 상하삼엽화문어미(上下三葉花紋魚尾), 광곽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다. 반곽 크기는 가로 15㎝, 세로 22.6㎝이다. 행수는 10행, 한 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구성/내용]
권두에 이약우의 서문과 총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시와 표문(表文)이다. 오언절구, 율시, 고시, 칠언절구, 율시, 고시장편의 순으로 시체별로 대략 140여 수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중에서 스승인 정홍명(鄭弘溟)을 비롯하여 홍명하(洪命夏), 오정원(吳挺垣), 이경휘(李慶徽), 오정일(吳挺一), 오두인(吳斗寅), 김육(金堉) 등에 대한 만시(挽詩)가 32수이다.
권2는 문(文)으로, 갈명은 이문저(李文著)의 묘갈명(墓碣銘)이며, 발(跋)은 정홍명의 문인 17명이 1644년(인조 22) 맺은 동문계첩(同門契帖)의 발문인데 동문의 의리와 스승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된 동문계첩의 명단과 서문은 부록에 실려 있다. 서례(書例)인 「북백해귀일증민대수육진혁막제조(北伯解歸日贈閔大受六鎭革瘼諸條)」는 1664년(현종 5) 함경도관찰사에서 체직된 후 후임 관찰사인 민정중(閔鼎重)에게 인계하면서 도내(道內)의 폐단과 그 지역적 특성을 조목별로 서술한 것이다. 이는 토노비(土奴婢)의 폐단, 사천(私賤)의 폐단, 양향(糧餉)의 폐단, 토호의 폐단, 외창(外倉)과 병정(兵政)의 폐단 등 모두 22조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사 12편은 정책을 건의한 계사와 인혐계(引嫌啓)로 나뉘어 각각 연도순으로 배열하였다. 이 중에서 1663년에 올린 「정원계(政院啓)」는 윤선도(尹善道)와 홍우원(洪宇遠)의 3년 복제설(服制說)을 비판한 내용으로 현종(顯宗) 연간의 1차 예송(禮訟)과 관련된 글이다.
권3~4에는 70편의 소(疏)가 시기 순으로 실려 있다. 1651년 「사봉교소(辭奉敎疏)」부터 1671년 「청해일임소(請解一任疏)」까지 대부분이 사직소(辭職疏)이다. 권3의 1664년에 올린 「사함경감사소(辭咸鏡監司疏)」 이하의 여러 상소는 김만균(金萬鈞)의 상소 처리 문제로 송시열(宋時烈)과 갈등이 생기자 올린 것이고, 권4의 1669년에 올린 「청침설창소(請寢設倉疏)」는 안면도의 창사(倉舍) 설치 문제로 송시열의 의견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당시 사림과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을 받았다.
권5~6은 부록이다. 권5에는 연보와 유사(遺事), 동문계첩, 교서(敎書), 제문, 만사(挽詞) 등이 실려 있다. 연보는 1857년(철종 8) 연시례(延諡禮)의 기사까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문집 간행 즈음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동문계첩에는 정홍명의 문인 17명의 명단이 들어 있다. 권6에는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시장(諡狀)과 성근묵(成近默)이 지은 행장(行狀), 정원용(鄭元容)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조휘림(趙徽林)이 지은 묘지명(墓誌銘), 서필원이 배향된 전주(全州) 반곡서원(盤谷書院)의 향축문(享祝文)이 실려 있다. 끝에는 1863년 김기찬이 지은 발(跋)과 6세손 서영지(徐榮智)의 지(識)가 있다.
[의의와 평가]
『육곡유고』는 화재로 자료가 유실되어 많은 양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양란(兩亂) 이후의 피폐한 사회상과 사회적 모순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어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