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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215
한자 金若采
영어음역 Gim Yakchae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산
대표관직 대사헌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광산김씨 논산 입향조.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김정(金鼎)이고 어머니는 전법판서(典法判書) 이방(李昉)의 딸로서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광산김씨의 연산 입향사적은 불분명하나 입향조는 김약채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전된 김약채의 묘가 경기도 양주 풍양에 있었고 아들 김문(金問)의 묘는 장단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관직 생활 때문에 개성 근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문의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가 청상과부로 수절하면서 자손을 잘 키웠고 그녀의 묘소가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으며 후손의 묘도 연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정한 입향조는 양천허씨로서, 본격적인 세거는 양천허씨의 손자 김국광(金國光) 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김국광김겸광(金謙光)이 각기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과 우참찬에 오른 이후 광산김씨는 전국적인 문벌의 대열에 올라섰다. 연산면 일대에 살고 있는 광산김씨는 1930년대에는 115호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정확한 세대수를 파악하기 어렵다.

[활동사항]

김약채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우왕 때 좌사의(左司議)를 역임하고 조반(趙胖)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였는데, 염흥방(廉興邦)조반을 무복(誣服)시키려고 참혹하게 다스리자 무고함을 밝혀 조반을 석방시켰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지신사(知申事)로서 이에 항거하였다가 유배되었다.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문하부좌산기(門下府左散騎)에 이르렀다. 1400년(정종 2) 훈신들의 사병을 허용하는 제도를 없애고 병권을 모두 중앙에 집중시키는 중앙집권화를 역설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대사헌을 지냈으며 1404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묘소]

묘소는 본래 경기도 양주 풍양에 위치하였으나 유실되어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하였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예조판서겸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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