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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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益 |
영어음역 | Seo Ik |
이칭/별칭 | 군수(君受),만죽(萬竹),만죽헌(萬竹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정의]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부여(夫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서진남(徐震男)이고, 어머니는 직제학 이약해(李若海)의 딸로서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활동사항]
서익은 1554년(명종 9) 13세 때에 향시에 장원하고 156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병조좌랑, 이조좌랑, 교리, 사인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서천군수, 안동부사, 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의주목사로 재직 시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李珥)와 정철(鄭澈)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서익은 의주목사 재직 시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으며, 또 돌아와서는 12책(策)을 올리는 등 군사 방면에서 다양한 건의로 하였다. 문장, 도덕,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와 정철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은진현에서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그루를 심고 만죽정(혹은 세실정)을 지었다. 그의 자손들이 현달하여 은진현의 중심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저술과 작품]
유고로 『만죽헌집(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묘소]
묘소는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의 부여서씨 재실 북동쪽 샛길로 300m 정도 거리에 있다. 묘비의 비명(碑銘)은 이재가 찬술하고, 묘갈명은 5세손 서정덕이 전서로 써서 1672년(현종 13)에 세웠다. 묘소는 묘비와 함께 석주, 문인석, 상석, 동자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훈과 추모]
논산시 은진면에 있는 갈산서원에 배향되었다가 1867년(고종 4)에 가야곡면 육곡리 행림서원(杏林書院)으로 옮겨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