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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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浚吉 |
영어음역 | Song Jungil |
이칭/별칭 | 명보(明甫),동춘당(同春堂),문정(文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성격 | 문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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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
성별 | 남 |
생년 | 1606년 |
몰년 | 1672년(현종 13) |
본관 | 은진 |
대표관직 | 이조참판겸좨주 |
[정의]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아버지는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이다.
[활동사항]
1624년(인조 2) 진사가 되었고, 163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마(洗馬)에 제수된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대군사부·형조좌랑·사헌부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단지 1633년에 잠깐 동몽교관을 지내다가 장인 정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金長生)의 아들로 산당(山黨)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송준길도 발탁되어 오위부사직·세자시강원진선·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 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송준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사헌부집의·이조참의겸찬선 등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겸좨주를 거쳤다.
1659년에는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인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만 1년)를 주장할 때 그를 지지하여 남인(南人)인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하여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그 뒤에도 우참찬·사헌부대사헌·좌참찬겸좨주·세자시강원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게 되어, 이번에는 남인이 기년제설을 내세워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누르고 주장을 관철시킴으로써 남인이 정권을 장악, 1675년(숙종 1) 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이 삭탈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학문과 사상]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였고, 20세 때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송시열과 같은 종파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어록해(語錄解)』, 『동춘당집』이 있다.
[묘소]
묘소는 처음 연기군 죽안리에 있었다가 3년 뒤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으로 이장하였고, 1700년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756년(영조 32)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숭현서원(崇賢書院)·충현서원(忠賢書院)·봉암서원(鳳巖書院)·돈암서원(遯巖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창주서원(滄洲書院)·흥암서원(興巖書院)·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