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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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時烈 |
영어음역 | Song Siyeol |
이칭/별칭 | 성뢰(聖賚),영보(英甫),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문정(文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정의]
조선 중기 논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우재(尤齋). 봉사(奉事)를 지낸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로서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1625년(인조 3)에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활동사항]
송시열은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 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 이이(李珥), 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였다. 1625년(인조 3)경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 문하로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 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논산 지역에서의 활동을 살펴보면, 먼저 논산시 연산면 임리의 양성당(養性堂)과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의 임리정(臨履亭)에서 김장생·김집 부자의 문하에서 수학한 한 연유로 돈암서원(遯巖書院)과 죽림서원(竹林書院) 창건에 참여하여 두 부자의 묘갈명를 찬술하였다. 또한 현재의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팔괘정(八卦亭)을 건립하고 이이(李珥)를 추모하면서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과 강학하였다. 노성 보인당(輔仁堂)의 『강안(講案)』(1617년 작성)에 의하면 송시열이 동조사(東曹司)로 되어 있어 이 지역 사류들과 강학하고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사상]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하였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고,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되었다. 그는 학문과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김집 부자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慶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山黨)으로 불렸고, 한때는 남인 권시(權諰)·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로 일컬어진다. 그밖에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하여 재정비된 정통 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義)』·『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誡女書)』 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되어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된 『우암집(尤菴集)』이 있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9세손 송병선(宋秉璿)·송병기(宋秉夔)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宋書拾遺)』 9권, 『속습유(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되어 『송자대전』 7책으로 간행되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약 70개소에 배향되었는데, 이 가운데 사액서원이 37개소이다. 논산 지역에서는 돈암서원과 죽림서원에 배향되었다. 또한 1744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됨으로써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