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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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宣擧 |
영어음역 | Yun Seongeo |
이칭/별칭 | 길보(吉甫),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문경(文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인.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길보(吉甫), 호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딸이다. 윤문거(尹文擧)가 형이며, 윤증(尹拯)이 아들이다.
[활동사항]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형 윤문거와 함께 급제하였다.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입국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을 모아, 사신의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힐 것을 주청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처 이씨(李氏)가 자결하였으나 윤선거는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하였다. 1651년(효종 2) 이래 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켜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강화에서 부인을 잃은 뒤 노성 본가에 머물지 않고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마하산 자락에 서재를 짓고 은둔하며 유계(兪棨)와 이웃에 살면서 강학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이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하였는데, 뒷날 후손들 사이에 유계와의 공편 문제로 아들인 윤증과 송시열 사이에 배사론(背師論)이 일어났다.
[학문과 사상]
김집(金集)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몰두하였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유계·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의 유림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송시열이 경전(經傳)의 주해 문제로 윤휴(尹鑴)와 사이가 나빠지자, 평소 윤휴와 친교가 깊고 그의 자질을 아끼는 마음에서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여서 교분이 두터웠던 송시열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뒤에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저술 및 작품]
『가례원류』·『후천도설(後天圖說)』 및 이에 관하여 유계와 논변한 편지를 비롯하여 『계갑록(癸甲錄)』·『노서유고(魯西遺稿)』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