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300 |
---|---|
한자 | 兪棨 |
영어음역 | Yu Gye |
이칭/별칭 | 무중(武仲),시남(市南),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정의]
조선 중기 논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할아버지는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수안군수를 지낸 유대경(兪大敬)이고,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유양증(兪養曾)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병조참판 남이신(南以信)의 딸이며, 부인은 세종대왕 9세손 이산악(李山岳)의 딸 전주이씨(?~1667)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유계 집안과 통혼한 가문은 파평윤씨, 은진송씨, 남원윤씨, 경주이씨 등이다.
[활동사항]
1630년(인조 8)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 죄로 임천에 유배되었고,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서실(書室)을 짓고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윤선거(尹宣擧)와 이웃에 살며 교유하면서 『가례집해(家禮集解)』를 개작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술하였다.
1644년 승정원주서로 기용되어 이듬해 무안현감이 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부교리로서 왕의 장례 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라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이어서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 자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宗) 자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유계는 유배지에서 날마다 주자의 글을 일과로 삼았고, 손수『주례(周禮)』를 베껴서 그 의의를 연구하였으며, 북방 사람들에게 자식을 가르치도록 타이르기도 하였다.
1652년(효종 3)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추천으로 시강원문학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1659년 병조참지로서 비변사부제조를 겸하고, 이어서 사간원대사간·공조참의·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승정원부승지 등을 지냈다. 1659년 2월 8일 유계는 송시열 등과 의논하여 양반 호포론을 제기하였고, 효종이 승하하고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 3년설을 주장하는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등의 남인을 논박하여 유배 또는 좌천시켰다. 1662년(현종 3) 예문관제학을 거쳐 1663년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학문과 사상]
유계는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의 학통을 이어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예론의 입장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의 유림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저술과 작품]
저서로 『시남집』, 『가례원류』, 『여사제강』, 『강거문답』 등이 있다. 특히 『가례원류』는 김장생의 예설에 토대를 둔 학설을 밝힌 저술로, 뒷날 윤선거와 함께 저술하였는지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산 96-1번지[상중와길 74-88]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