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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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拯 |
영어음역 | Yun Jeung |
이칭/별칭 | 자인(子仁),명재(明齋),유봉(酉峰),문성(文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연숙 |
성격 | 문인|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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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
성별 | 남 |
생년 | 1629년 |
몰년 | 1714년(숙종 40) |
본관 | 파평 |
[정의]
조선 후기 논산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활동사항]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35세에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이후 공조랑·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0년(숙종 6)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그를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하였으며, 나중에는 특별히 분부를 내려 부르기도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여 군왕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오직 윤증뿐이었다고 세간에 알려졌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사헌부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령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1699년(숙종 25)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그즈음 윤증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아져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를 모방하여 거상 중에 강학(講學)을 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고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학의 사장(師長)으로서 문중 운영과 종학에 힘을 쏟았다.
[학문과 사상]
1642년(인조 20) 14세 때 아버지 윤선거가 유계(兪棨)와 함께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온 마음을 쏟기로 마음먹었다. 19세에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권시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전에 주자에 관한 책을 김집(金集)에게 배웠는데, 김집은 송시열(宋時烈)이 주자학에 정통하므로 그에게 배우라고 하였으므로 29세 되던 해에 송시열에게 가서 사사하여 『주자대전』을 배웠다. 저서로 『명재유고(明齋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1722년(경종 2)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작되었다. 지방 유림들의 합의로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江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