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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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竹林書院 |
영어의미역 | Jungnim Seowon |
이칭/별칭 | 황산 서원,육현 서원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101[금백로 20-3]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죽림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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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죽림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서원 |
건립시기/일시 | 1626년 |
정면칸수 | 죽림사 3칸|헌장당 3칸|서재 3칸 |
측면칸수 | 죽림사 2칸|헌장당 2칸|서재 2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101[금백로 20-3]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에 건립된 서원.
[위치]
논산시에서 익산 방향으로 국도 23호선을 타고 약 9.71㎝ 가면 강경읍이 나온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약 0.72㎞ 가다보면 황산리가 나온다. 죽림서원은 황산리에서 북쪽에 솟은 동산을 두고 금강 쪽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변천]
죽림서원은 1626년(인조 4)에 세워졌다. 1663년(현종 4)에 중건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1665년 사액되었다. 본래 창건 때에는 지명을 따서 황산 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 또한 서원에 제향된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의 6인이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儒賢)이라 하여 육현 서원(六賢書院)이라 부르기도 했다.
죽림서원의 창건에 최초 발의하고 건의한 인물들은 김장생의 문인인 최명룡, 송흥주 등이었다. 이들이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황산사(黃山祠)가 죽림서원의 기원이다. 황산사는 후에 황산 서원이라 불리다가 1665년 사액이 되면서 죽림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71년(고종 8) 서원 훼철령이 내려졌을 때 철폐되었는데, 해방 후 1946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단소(壇所)가 설치되고 196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죽림서원의 앞면은 평지로 이루어졌고, 배면에 약한 구릉을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다. 작은 마당을 두고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으며, 마당을 지나 안으로 진입하면 낮게 한 단을 조성하여 신문(神門)을 두었고, 사우인 죽림사가 위치해 있다. 죽림사(竹林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열은 내부 공간으로 꾸몄다. 이곳에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아 두었다.
강학 공간의 동·서 양재는 마주보고 있어 형태가 다른 서원들과는 다르다. 보통 양재는 수평, 수직을 맞춰 대면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재가 사선으로 틀어진 채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고종 때 훼철당한 뒤, 후에 복원하면서 대지의 조건에 따라 배치하려다 현재의 형태가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배치 형태가 질서 정연하지 못하다. 사우의 앞면 좌우측에는 공적비와 중건비 등이 세워져 있으나 좌대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헌장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면 열은 퇴간이고, 뒷면 열은 온돌방을 두었다. 1고주 5량가 구조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박공으로 처리를 하였다. 서재는 수직사를 겸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외삼문 쪽 1칸은 부엌, 나머지 2칸은 온돌방이다. 1고주 5량가 구조로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기둥머리는 민도리집 구조이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 남부 공주목에 속하였던 논산은 거의 서인계, 또는 노론계의 일색이었는데 죽림서원의 경우 영남학파인 조광조와 이황, 기호학파의 거유인 노·소론의 이이와 성혼, 노론의 조종(祖宗)인 김장생과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어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이황이 어떠한 연유로 서인 및 노론의 대표 인물들과 함께 제향될 수 있었는지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