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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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養性堂 |
영어의미역 | Yangseongdang Hal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성격 | 서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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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조선 중기 |
정면칸수 | 5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조선 중기 학자 김장생의 서재.
[개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생전에 관직에 나가는 것보다 연산이나 연산과 가까운 곳에 서재(書齋)를 짓고 문인들과 강학하며 지내는 것을 즐겼다. 양성당은 1602년(선조 35)에 정인홍(鄭仁弘)의 용사(用事)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에 내려와 아한정(雅閑亭)의 유지(遺址)에 지은 서재이다.
[위치]
원래는 논산시 연산면 임리 숲말에 있었는데 사계천이 홍수로 범람하여 1880년(고종 17)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변천]
양성당의 전신은 아한정이다. 아한정은 원래 최청강(崔淸江)의 별업(別業)으로서, 이때의 것으로 보이는 제영 중에 김국광, 신숙주의 것이 있다. 이로 보아 최청강은 아한정에서 당대의 명신들과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아한정은 김장생의 백조부 김석(金錫)이 구입하였는데, 아들이 없던 김석이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金殷輝)를 입후하여 가계를 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아한정은 김장생이 어렸을 때 수학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 후에 아한정은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없어져 터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장생이 그 자리에 소당(小堂)을 짓고 양성(養性)이란 편액을 건 다음 강독하는 장소로 삼았다.
초기 양성당 강학 시절의 문인으로는 최명룡(崔命龍), 유즙(柳楫), 김동준(金東準),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박미(朴瀰) 등이 있다. 또한 양성당에는 여러 명사들에게 구한 여러 편의 시가 있는데, 김상용(金尙容), 정엽(鄭曄), 조익(趙翼), 소광진(蘇光震), 이단하(李端夏), 심광세(沈光世), 홍천경(洪千璟), 신흠(申欽), 황혁(黃爀), 권진기(權盡己), 김상헌(金尙憲),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김지남(金止男), 양경우(梁慶遇)의 것으로 김장생의 동문수학한 친구나 문인들이다.
이들이 시를 지은 연대를 보면 양성당 건립 직후부터 김장생이 죽기 전까지이다. 이를 보아 김장생은 양성당에서 문인 양성은 물론 서인 중진들과 시를 읊조리며 우의를 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호서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논산 돈암서원 건립 당시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서원 건립 과정에서 중앙 정부의 긴밀한 협조를 받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형태]
양성당은 논산 돈암서원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는 서재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각 칸을 하나씩 방으로 꾸미고 가운데 3칸 앞면에는 툇간을 만들어 마루를 깔고 뒷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양 측면의 1칸통은 각각 큰 온돌방이다. 장대석 두벌대로 기단을 만들고 방형추 모양의 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방형 모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장여를 받친 굴도리를 대들보와 함께 기둥에 맞추고 기둥에는 주련을 달아두었다.
창호는 정면과 뒷면에만 달아 두었는데, 모두 띠살 본합문이다. 가운데 3칸 띠살문 위에는 횡으로 긴 창을 달았다. 양 측면은 벽으로 막았으며, 양 협칸과 뒷면 창호 밑에는 머름을 달아두었다. 가운데 3칸의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양 협칸 방은 반자위에 종이 바름으로 마감하였다.
[현황]
김장생의 막내아들인 묵재 김비(金棐, 1613~?)가 양성당의 시들을 모아 편찬한 『양성당제영(養性堂題詠)』을 충청남도 문화재위원인 김영한(金英漢)이 소장하고 있다. 『양성당제영』의 발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7)이 지었다.
[의의와 평가]
양성당의 전신인 아한정은 김장생이 송익필에게 예학의 기초를 닦은 곳으로 예학의 종장(宗匠)이 되는 터전이며, 양성당은 김장생의 고제적 서재로서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그를 추앙하는 각지의 유생들과 강학하였던 강도지당(講道之堂)으로서, 호서 사림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