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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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翼弼 |
영어음역 | Song Ikpil |
이칭/별칭 | 운장(雲長),구봉(龜峰),문경(文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휴정서원에 배향된 조선 중기의 학자.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 아버지는 판관 송사련(宋祀連)이다.
[활동사항]
송익필은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으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송익필은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를 한 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1586년(선조 19)에는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면서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성명을 갈고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신분이 회복되었다. 뒤에 또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동생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 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학문과 사상]
송익필은 성리학에 통달하고 특히 문장에 능하여 당대의 8문장가에 속하였다. 그는 1586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경기도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徐渻)·정홍명(鄭弘溟)·강찬(姜燦)·김반(金槃)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저술과 작품]
저서로 시문집인 『구봉집(龜峰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사후인 1752년(영조 28)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다. 1699년에 건립한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는 휴정서원(休亭書院)에 추배되었다. 1720년 윤봉구가 송익필을 제향하기 위하여 입한재(立限齋)를 세웠고, 이후 1802년과 1835년에 보수 중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