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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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森 |
영어음역 | Yi Sam |
이칭/별칭 | 원백,백일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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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677년 |
몰년 | 1735년 |
본관 | 함평 |
대표관직 | 병조판서 |
[정의]
조선 후기 논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원백(遠伯). 영조의 아낌을 받아 백일헌(白日軒)이라는 호를 받았다. 함평군 이사길(李師吉)과 남양전씨 사이에서 1677년(숙종 30)에 태어났다. 이삼의 가계는 상계로 올라가면 무반 가문의 전통이 강했다. 그러나 고조 이후는 문반으로서의 성향이 더해져, 이삼이 ‘문무겸전’의 인물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활동사항]
이삼은 윤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힘과 담략이 뛰어남을 보고 병조판서 김구(金構)가 권고하여 1705년(숙종 31) 무과에 응시, 급제하였다. 1713년 정주목사로 임명된 뒤 1717년 평안도병마절도사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사 등을 지내면서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였고, 경종 때 소론으로서 경종의 신임을 받아 수원부사·우포도대장·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721년 총융사·한성부우윤, 1724년 어영대장을 지냈다.
이 시기 정쟁에 연루되어 일시 귀향하였으나 후에 다시 훈련대장이 되었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여 분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함은군에 봉해졌다. 그 뒤 여러 차례 이인좌의 무리라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무사했으며, 1728년에 한성부좌윤으로 임명되었고, 1729년에는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730년 6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이렇듯 무인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삼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장수로서의 기품을 간직한 당대의 명장이자, 군사지략과 무예·군법·군제에 조예가 깊었으며, 군선과 무기 제작에도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 저서로 『관서절요(關西節要)』가 있다.
[묘소]
이삼의 유서와 자취는 논산 지역에 잘 남아 있는데, 현재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가재울마을에 묘소와 영당이 있다. 부인 진주유씨와 합장하여 유택을 마련하였는데, 백일헌 영당의 뒤편에서 동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삼은 1735년(영조 11) 정월 10일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삼의 부음을 들은 영조는 애도의 뜻으로 철조와 철시를 명하고 신하들이 진달한 바에 따라 우찬성 함은부원군(右贊成咸恩府院君)으로 추증하였으며, 예관을 보내어 제를 올렸다. 현재 주곡리에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집짓는 재료들을 하사받아 지은 고택이 남아 있으며, 언월도(偃月刀), 철퇴(鐵槌), 영정(影幀), 은배(銀杯)와 전적, 고문서 등 많은 유품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