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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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方漢旻 |
영어음역 | Bang Hanmin |
이칭/별칭 | 아성(牙城)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진호 |
성격 | 언론인|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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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
성별 | 남 |
생년 | 1900년 1월 16일 |
몰년 | 1968년 2월 9일 |
[정의]
일제강점기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활동사항]
방한민은 1920년 『조선일보』 창간을 주도했으며, 편집 및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제의 잔학성을 폭로 규탄하는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恨)」이란 배일(排日) 연재 기사를 게재하였다. 일제의 간섭과 압력으로 조선일보에서 해고를 당하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정창선(鄭昌先)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의 힘을 모아 1922년 6월 11일 문화신문(文化新聞)을 발간하고 주간을 맡아 조선문화의 창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3년 7월 4일 간도에서 동양학원(東洋學院)의 설립을 발기하고 추진하였다. 철도 개통식에 참석 예정인 조선 총독을 주살하고 일본 은행 등에 폭탄을 투척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다가 폭탄 30개와 선전문이 발각되어 동지인 동아일보 지국장 김정기(金正璂), 김사국(金思國) 등 10명과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당했다. 1923년 12월 24일 청진(淸津)지방법원에서 폭발물취제령 위반 등으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1928년 6월 2일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면의 유지 120여 명의 진정(陳情)으로 4년 6개월 만에 가석방되었다. 가석방으로 출옥한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31년 초에 안상훈(安相勳) 등의 동지와 함께 일제에 체포당하였다. 1931년 6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명으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