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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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臨履亭記碑 |
영어의미역 | Literature Monument of Imrijeong Pavilio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금백로 20-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연숙 |
성격 |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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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875년(고종 12) |
관련인물 | 김장생|최명룡|송흥주|윤운구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금백로 20-8] |
소유자 | 광산김씨 종중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김상현(金尙鉉, 1811~1890)의 「임리정기」를 새긴 비석.
[개설]
임리정(臨履亭)은 1606년 사계 김장생(金長生)이 최명룡·송흥주·윤운구와 집을 지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강경의 황산(黃山) 산기슭에 있다. 이로 인하여 네 사람은 이이(李珥)의 묘당을 세우고자 약속하였으나 당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1626년(인조 4) 송흥주가 주변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임리정에 이이의 사당을 세우고 성혼(成渾)도 배향하였다. 그 후 김장생·조광조(趙光祖)·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으며, 1665년(현종 6) 죽림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죽림서원(竹林書院)은 1860년에 중수하였다가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건립경위]
죽림서원은 1860년 김장생의 후손 김한현의 감독 하에 중수되었다. 그 후 1871년 죽림서원이 훼철되었으나 임리정은 헐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후손 김광현이 임리정을 보호하면서 조선 말기 문신이자 문장에 능했던 김상현(金尙鉉, 1811~1890)에게 그 일을 기록해 주도록 청하였다. 이에 따라 1875년(고종 12) 김상현이 지은 「임리정기」를 돌에 새겨 임리정기비를 건립하였다.
[금석문]
임리정기비의 비문은 김상현이 찬하고, 김영목(金永穆, 1835~1910)이 썼다. 내용을 살펴보면, 「임리정기」에는 김장생의 강학처에 정자를 세우고, 서원을 창건, 추배, 훼철되기까지의 일과 임리정기비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슬프도다. 정자는 한 도리의 작은 규모이나 우주 변화의 묘함을 거두어들이고 음양의 커지고 작아지는 기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험준한 바위를 끌어안고 큰 물결과 급한 소용돌이를 가슴에 안으니 앞으로 오래도록 이지러지지 않으며 장차 더불어 그 수명을 함께 할 것이다.
제향은 비록 폐지하였으나 6선생의 영령은 평안하니 거의 300년 가까이 소나무와 대나무, 날짐승과 물고기들도 어짊과 지혜의 가운데에 젖어들게 하였으니 도통의 전해짐이 해와 별과 같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하늘의 광경은 예로부터 항상 새로움과 힘입은 바니 이치 역시 멀지 않아 회복됨이 있으리라. 아마 백세를 기다리지 않아 논하여 결정되지 않겠는가. 정자의 편액은 임이인데, 선생께서 명하여 한 것인지, 아니면 이 편액이 우암의 친필이니 우옹이 이름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시경』에 이르되 “매우 두려워하여 조심하기를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한 것 같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는 말이 있으니 지금 이후에 우리는 걱정을 면하게 되었으니 이는 증자의 말씀이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오로지 증자의 학문에 힘을 썼다. 이런 까닭에 우옹이 선생의 유고의 서문에서 이르기를 “옛날 공자의 제자들은 총명하고 재변이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마침내 그 도통은 자질이 노둔한 증자가 얻었을 따름이다. 이 정자의 이름은 모두 이런 뜻에서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임리정기비는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죽림서원의 남쪽 언덕 임리정 앞마당 비각 안에 보호되어 있다. 임리정 주변에는 임리정 중수·개수 등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건물의 초석용 석재 수십 개가 흩어져 있다.